[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86)

  • 입력 1996년 10월 17일 10시 39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34〉 그 선배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화장실에 다녀오던 나는 여느 때처럼 상현의 술 자리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진희! 인사도 안 하고 들어가냐?』 고개를 돌려보니 선배가 스스럼없고 따뜻한 눈길로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선배의 밝은 표정을 보자 내 입가에도 반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상현과 한 편이 되어 나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어색해 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나는 짧은 인사만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 나는 잠깐 바깥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팔십칠년 대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들의 화제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국 선거 결과에 대한 비분강개로 되돌아오곤 했다. 상현이 특히 흥분했다. 『육이구고 뭐고 대체 누구를 위해서 다들 그짓을 한 거야? 민중? 그래서, 그 민 중이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것들이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어놨냐 말야. 민중이란 어리 석은 것들을 위해서 목숨 내놓고 미친 짓 한 사람들 모조리 헛지랄한 거라구』 다들 그에 동조하여 한마디씩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자 이런 말이 들려왔다. 『민중이란 어리석은 거야.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한 거지. 사랑이 란 것은 상대가 못난 짓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선배의 목소리였다. 상현이 뭔가 소리를 치며 반대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으며 나는 돌아누워서 잤다. 상현은 그날의 일을 잊지 못했다. 내가 선배에게 웃었던 것과 그 선배에게 면박을 당한 일 모두를. 열등감은 대개 의처증이란 합병증을 얻는다. 그날 이후 그는 내게 주먹을 들이댈 때마다 그 선배의 이름을 들먹였다. 대학원 시절부터 둘 사이가 수 상하더라고 하더니 깊은 관계였다는 둥 결혼 후에도 계속 만나왔다는 둥 온갖 이야 기를 지어냈다. 거짓말에 뛰어난 그다운 상상력이 동원되어서 선배와 나 사이의 더 러운 내연관계는 그 구체적인 전모가 속속 드러났다. 그 무렵의 어느날이던가. 나는 아침에 우유를 마시다가 난생 처음 느끼는 거북스 러운 비릿함 때문에 심한 구역질을 했다. 내 뱃속에서 한 생명이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글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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