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85)

  • 입력 1996년 10월 15일 06시 42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33〉 나는 때리면 맞았고 부수면 말없이 치웠다. 젖지 않은 몸속으로 뚫고 들어올 때에는 이마를 찡그린 채 여러 가지 딴 생각을 하려고 애쓰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먹지 않는 술국을 더 이상 끓이지 않았고 돈이 떨어졌다고 투덜대도 못 들은 척했다. 그 동안은 그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부랑 아처럼 꾀죄죄하게 하고 다니는 게 싫어서 출근시간에 쫓기면서도 그의 구겨진 바지 를 다리고 옷소매의 흙을 털곤 했지만 이젠 그런 귀찮은 짓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상현이 먹거나 입거나 하는 일에 관심도 없었으며 남 앞에서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일이나 파격적인 행동 속에 인간미를 찾으려는 따위의 그의 인생에 대한 어떠 한 새로운 해석도 내리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흥미가 없었다. 그러자 상현은 몹시 불행해 했다. 나는 내 결혼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채 살고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 다. 게다가 자기 혼자만 불행하고 나는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으로 보아 결혼이 실패한 모든 원인을 내 탓이라고 분석했다. 내가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억 지를 부리더니 나중에는 그 사실에 확신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증오하기 시작 했다. 밤늦게 사람들을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거의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는 「자, 어떠냐 내가 저 여자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산다」는 제스처 를 해보이며 같이 온 사람들을 자기의 불행에 대한 공증인으로 삼았다. 나중에 그들 이 돌아간 다음에는 와장창, 술상을 엎는 것으로 내게 맞을 준비가 다 되었느냐는 신호를 보냈다. 언젠가 한 번 내가 그의 술자리에 얼굴을 내민 적이 있었다. 나의 대학원 선배가 그 술자리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인사를 한 것이었다. 그 선배는 상현과 달리 진정 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적을 당한 뒤 형을 마치고 나온 그 선배가 싸구 려 무협지 전집을 팔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 상현은 코웃음을 쳤었다. 자기한테까지 찾아왔기에 까짓 한 질을 선뜻 사주었다고 으쓱대는 상현을 보며 나는 그가 그 선배 에게 깊은 열등감을 느끼고 있음을 짐작했다. <글: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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