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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삶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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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삶과 예술

김민기자 입력 2019-10-16 16:33수정 2019-10-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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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의 귀국회견 고국을 떠난 지 34년만인 84년 귀국하여 부인 구보다 시게코여사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백남준(오른쪽). 이 자리에서 그는“예술은 사기다”를 외쳐 문화계에 큰충격을 주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7일부터 열리는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백남준’ 전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가한 백남준의 작품을 25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해 선보인다. 당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귀국한 백남준의 기고가 같은 해 9월 26일자 동아일보 ‘나의 길’ 코너에 게재됐다.

이 글에서 백남준은 “비디오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 정서에 반해 만인이 즐겨보는 대중매체를 예술형식으로 선택한 예술깡패”라고 자신의 예술을 소개했다. 또 자신이 황금사자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는 “유네스코에서 주는 피카소상도 타보았고 독일정부의 카이저상도 타보았는데 모두 특별상이었다. 특별상이란 조선 사람에게 대상을 주기 아까우니 이름으로 때우는 경우”라며 “독일정부에 의해 천거된 한국인이어서 대상을 받게 된 것이 진기하다”고도 말했다.

자신의 배경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나의 조부가 섬유회사 경영자로 별로 돈 걱정을 안하던 사람이지만 예술가 노릇을 하며 넉넉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일제하 학창시절에 마르크스주의자로 분배의 정의 없이는 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치열하게 했고, 그것이 냄새나는 예술을 거부하게 만든 힘”이라고 털어 놓는다. 또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요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시절이 만나 놓은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도 언급했다.



테이트모던 전시가 조명한 ‘국제인’으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백남준은 “외국에 살면서 조국에 애국하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며 “외국에 살려면 그 나라에 적극 도전해 그들과 싸우고, 그래서 그들보다 우수하게 되었을 때 조국에 대한 애국이 저절로 성취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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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한국 예술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일본인은 개미처럼 집단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한국인은 모래처럼 흩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발상이나 적어도 예술분야는 개미보다 독립적인 모래알이 낫다. 나는 그래서 한국예술계의 앞날을 낙관한다.”

아래는 백남준이 기고한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의 전문이다.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백남준. 1993년 9월 26일 동아일보 기고)

84년 정월, 그 해가 되면 세상이 망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남긴 조지 오웰에게 한바탕 야유를 보내고 오랜만에 고국에 들렀다. 1950년 7월에 한국을 떠나 34년만에 처음 공식적으로 한국에오는 길이었으니 감회도 깊었으려니와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내 이름이 한껏 알려진 터라 무슨 금의환향이나 하듯 공항에서부터 법석을 떨었다.

공항에서 어느 기자가 내게 “예술이 뭐냐”고 물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술이나 한잔 마시고 푸념조로 넋두리하듯 예술가들끼리 하는 질문이지만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예술은 사기야”

다음날 한국의 굵직한 신문들이 모두 큰제목으로 白南準(백남준) 왈 “예술은 사기다”라고 대서특필했다. 예술을 사기로 몰아붙인 것 같아 내심 가슴도 아팠으나 예술이 사기란 말은 내가 개발한 꽤 괜찮은 반어법 중 하나라서 웃고 지나갔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났는데 아직 내게 이 말에 대하여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예술은 정말 사기이거나 아니면 정반대인 모양이다. 예삿일이 아니다.

나는 자서전을 쓸만한 위인도 아니고 또 그럴 나이도 아니며 앞으로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니 너절한 얘기는 안 하는게 상책인 것 같다. 다만 몇 가지 생각나는 일만 그림 그리듯 써놓고 독자들은 그것을 비디오 보듯 봐주면 그만이다. 내가 획책하는 예술이란 늘 관람객이 즐기고 잘 봐주면 족한 것이니….

내 일생은 태어나서 열여덟까지 한국에서 산 것을 제외하고는 늘 외지 생활이다. 그것이 팔자소관 아니고는 나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7년, 독일에서 7년, 미국에서 29년, 모두 43년간 외국생활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외지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은 떠나지 않는다.

나는 간혹 한국에 갈 때면 옛 동창생들을 만난다. 白寅洙(백인수) 廉普鉉(렴보현) 崔景漢(최경한) 朴漢洙(박한수), 徐載雄(서재웅)등 코흘리개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은 대개 경기보통중학 동창생들인데 옛날에는 서로 시간이 없어 못 만났지만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다. 6·25 직전에 이들과 보낸 시간이지금도 머리에 선하지만 요즘 만나면 모두 환갑이 넘어 세월이 무상함을 느낀다. 모두가 묘자리를 봐둬야 할 나이다.

나는 86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 地官(지관)을 데리고 이상적인 묘자리를 찾아다닐 나이가 됐으나 나는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그런 국토 낭비 계획은 없애고 오붓하게 죽는 재미를 만드는 것이 상책이다. 내 인생의 행운은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조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시절에 만나 놓은 것이다”

나의 조부께선 國喪(국상)이 났을 때 만조백관의 상복을 마련하던 섬유회사 경영자였으며 선친은 태창방직 설립자였으니 나는 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별로 돈 걱정을 안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예술가 노릇을 하면서부터는 넉넉했던 적이 없다. 일제하 학창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었고 분배의 정의 없이는 義(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매우 치열하게 다가왔었다. 이 생각은 내 예술가로서의 전체 노정에 크게 작용했으며 냄새나는 예술을 거부하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은 이 냄새의 종류를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관건이며 그에 따라 사기도 되고 혹여 진실도 되는게 아닐까.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화랑에서 비디오예술의 첫 탄생을 알리는 전시회를 가질 때 나는 가진 돈 모두를 TV 13대를 사는데 탕진했다. 집에서 마지막 송금해온 돈을 다 써버린 셈이었다. 존 케이지는 50년대 말 독일 다름슈타트의 국제하계음악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났지만 독일의 영웅 조셉 보이스는 비디오 예술 첫 탄생일에 직접 내방하여예기치 않았던 퍼포먼스까지 해주었다. 그 친구는 내가 애지중지하던 이바흐(IBACH)피아노를 때려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를 해줌으로 해서 내 인생에 끼어들었다.

비디오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의 정서에 반하여 만인이 즐겨보는 TV라는 대중매체를 예술형식으로 선택한 일종의 예술깡패였다. 그 안에는 동양사상이나 한국의 고유한 이야기 등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서양인에게는 독특한 것으로만 보일뿐 눈치 채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존미술에 대한 항거, 예술의 대중성회복이란 때 이른 목표를 내걸었던 내게는 당시「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딱지만 붙었었다.

내가 미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실은 의외적인 것이다.1964년 일본에서 로봇과 비디오연구에 근1년을 보내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미국을 구경삼아 들렀다.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때 거리는 몸서리쳐지게 지저분했고 이런 곳에서 어떻게 팝아트가 나왔으며 부자나라 소리를 듣는가 의아했다. 당시 뉴욕에서는 뉴욕아방가르드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으며 나는 샬럿 무어맨이란 여자에게 걸려들어 이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참가했던 퍼포먼스는 이미 독일에서 했던 것이었고 뉴욕 리바이벌은 독일에서 했던「동양인 출신의괴짜역」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샬럿 무어맨과는 그가 저세상으로 가기 전까지 예술적 동지애를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정착은 이러저러한 일이 생기고 슬슬 재미가 붙어 눌러앉은 것이 30년이 다 되었다. 인생이란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1975년‘백남준에게 끌려가는 바이올린’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퍼포먼스를 통해 수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조차 음악의 상징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며 음악의 한계를 그것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또 TV를 통해 재미만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부처의 모습과달, 물고기, 컴퓨터그래픽 등을 넣어 재미를 방해했다. 나는 매스미디어가 독재자의 수중에 장악되어 민중의 눈을 가려 세상이 망하게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생각에 도전장을 냈다. 미디어는 정보를 전달해 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이며 그것은 정보단절의 시대에 대중의 눈을 일깨우는 이른바「전자초고속도로」라며「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만들었다. 따라서 84년 정월에 방영된 이 프로는 망하지 않고 건강하게 생존해있던 우리들이 조지 오웰에게 보내는 새해인사였다.

내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상을 받게 되었을때 한국에서 온 어느 여기자가 큰 상을 몇 번째 받느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유네스코에서 주는 피카소상도 타보았고 독일정부의 카이저상도 타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특별상이었다. 특별상이란 경우에 따라 조선 사람에게 대상을 주기 아까우니까 특별상이란 이름으로 때우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니스 비엔날레는 독일정부에 의해 천거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대상을 받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이 진기하다.

나는 외국에 살면서 조국에 애국하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외국에 살려면 그 나라에 적극 도전하여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보다 우수하게 되었을때 조국에 대한 애국은 저절로 성취된다. 참다운 민족주의는 드러내지 않는데 있으며 참다운 민족주의가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더욱 더 활발한 해외교류가 이루어져야한다. 국수주의가 횡행하는 곳에는 문화와 삶의 다양성이 없고 진취적 지식인들을 살인하게 된다. 사대주의는 망국병이지만 국수주의도 이에 못지않다.

일본인들은 개미처럼 집단으로 열심히 일하고 여행도 개미처럼 집단으로 한다. 한국인은 모래처럼 흩어져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일본인은 실수를 저질러도 집단으로 저지르며 한국인은 모래알 하나가 저지른다. 17년 전 결혼한 나의 아내는 일본인이니 우리 집안의 실수는 절충식인 셈이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발상이나 적어도 예술분야는 개미보다 독립적인 모래알이 낫다. 나는 그래서 한국예술계의 앞날을 낙관하는 사람이다.

예술 한답시고 건강은 돌보지 못한 덕에 오래전부터 당뇨에 시달리고 산다. 나는 내가 쓰러져 못 쓰게 되면 네덜란드로 보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는 안락사를 허락하는 곳이니까. 이제 광케이블 시대가 오면 예술도 한층 다양해지리라. 나의 미래작업은 광케이블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삶과 예술과 과학이 더 이상 은유가 아닌 실재의 정보로 다가오는 삶의 예술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케이블에 의한 정보시대를 역설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나의아이디어를 훔쳤다. 아마도 나는 다시 태어나면 예술보다 물리학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감상적인 추억보다 오늘하루의 일이 더 바쁘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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