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 그가 떠난 빈자리…노동의 새벽 달리는 ‘노회찬 첫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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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7월 23일 06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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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1분, 서울 거리공원 버스 정류장에 녹색 버스가 들어섰다. 첫차가 정류장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에서 ‘겨우 1분’ 늦었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졌나왔다. “여기서 1분이면 도착할 때 되면 5분 차이예요. 아침에 5분이면 얼마나 큰데…”

문을 열어 승객을 들인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올려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20여개의 좌석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여개는 기점에서 찼고, 신도림역 정류장에서는 좌석과 입석이 가득 찼다.

먼동이 트는 구로구 구로동의 새벽을 뚫고 서초구 고속터미널과 강남구 논현동·개포동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지선 6411번 버스는, 고(故)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 1주기를 하루 앞둔 22일도 그렇게 달렸다.

세상은 바른 방향으로 ‘진보’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정치인 노회찬은 그런 세상을 꿈꿨다. 엄혹했던 80년대, 고려대 재학 중 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 속에 들어가 노동 운동을 벌였던 청년은, 90년대 정계에 입문했으나 가슴 속에는 항상 비정규직이나 이름 없는 노동자가 있었다. 6411번 버스 스토리도 그런 노동 현장에 대한 관심에서 나왔다.

노 전 의원은 지난 2010년 3월 진보신당 대표로 서울시장 예비후보 출마 당시 ‘함께하는 새벽 첫차’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청소용역 노동자와 함께 6411번 버스를 탔다.

당시 노 전 의원은 자리가 부족해 바닥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있는 시민 등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침에 차가 한대 더 오긴 와야겠다. 아침부터 1시간씩 서가는 분들이…(많다) 버스회사와 이야기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종점에 내린 뒤에는 “콩나물 시루와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분들 나이가 60대가 넘는 듯 하다. 어렵게 사는 서울시민들 모습을 뼈저리게 느꼈고, 서울을 떠받들고 있는 분들이 힘든 출근길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이 버스는 노 전 의원이 지난 2012년 당 대표 수락연설때 다시 언급하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는 “이분(6411번 버스 첫차 탑승객)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그냥 아주머니이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이라며 “6411번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 노동자들은 한 달에 85만원을 받는 ‘투명인간’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아침에도 거리공원 정류장에는 오전 3시40분쯤부터 ‘투명인간들’이 모여들었다. 바로 앞 구로동에서, 멀게는 30분을 걸어 온 60대도 있다. 오전 1시30분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자택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기점까지 걸어온다는 박모씨는 “환승해서 가려면 너무 멀고,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을 넘게 서서 가야 해서 (기점에서 차를 타지 않으면) 일 시작도 전에 지친다”고 말했다.

“김씨는 휴가 갔나 보다. 지난주부터 안 보이네.”, “남편 손위 동서가 별세했는데 휴가 주려나? 오늘 가서 일 빨리 마치고 물어봐야겠다.”

자잘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차고지에서 출발한 버스가 들어오자 각자 편안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정류장에는 최모씨(75)만 남았다. 부인인 윤모씨(67)를 배웅하려고 나온 그는 “시간이 이르다보니 취객이나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봐 10년째 새벽 동행을 하고 있다”면서 떠나는 버스 쪽을 향해 짧은 손인사를 보냈다.

이들은 이름 밝히기를 극도로 꺼렸다. 그것은 단순히 이름을 알려지는 데 대한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이 아니었다. 10년여간 선릉역 인근 빌딩의 청소일을 해오고 있다는 70대 김모씨는 “남편은 이 일(건물 청소)하는 걸 알지만 자녀는 내가 새벽 등산을 다녀오는 줄 아는 경우도 있고, 사돈이 있는 경우에는 더 조심스럽다”고 자신이 투명인간이길 원하는 사연을 털어놨다.

지난 1년간 노 의원의 상징이 된 6411번 버스를 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자, 정치인 등이 많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새벽 버스 증차된다는데, 언론에 주구장창 나온 우리 노선은 왜 안 바뀌는 건지, 급행 노선이나 제발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박원순 서울시장님이나 문재인 대통령님이 한번 타보면 바로 알 텐데…”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시는 지난 6월 새벽 출근 노동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146번, 160번, 240번, 504번 등 4개 노선 첫차 배차를 늘렸다. 그러나 ‘노회찬 버스’는 혼잡한 정류장이 적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오전 4시20분, 버스가 대림역 정류장에 멈춰섰고 밀고 들어오는 승객에 더는 발디딜 자리도,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어지자 문득 ‘증차 노선은 과연 어떤 지경이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22일 첫차를 몬 버스 운전기사 문모씨는 “통상적으로 5분 간격인 버스가 이른 새벽에는 3분 간격으로 나가고 있으나 출퇴근 혼잡은 한결같다”고 밝혔다.

그런 탓에 이날 버스 안에서는 실랑이도 벌어졌다. ‘좌석 옆에 틈이 있는데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 노선 40년을 타도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봤다”, “당신이야말로 안하무인이다. 이 양반아!”라며 고성이 오고 갔지만 이내 “다같이 출근하는 길에 그러지 말자”라는 말 한마디에 상황은 바로 정리됐다.

이들도 각자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 60대 김모씨는 구로디지털단지의 전신인 구로공단에서 일본계 의료기기 업체를 15년간 다녔고, 70대 박모씨는 대형 청과물 가게에서 20년여 일했다. 대부분 지천명(知天命, 50세)이 넘어서 호텔과 오피스텔, 사무실 청소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김씨는 “경기도 좋지 않은데 자녀들에게 부담되기 싫고, 몸이 조금이라도 성할 때 일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를 쳤다.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이? 노회찬 의원…안타깝지. TV에서 유시민씨가 ‘회찬이 형’하면서 울던데…”

시끌벅적한 버스 안, 누군가의 입에서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기자를 바라보던 몇몇 시선이 어두운 창밖을 향했다. 한 시민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기 조심스럽고, 좀 미안한 감이 있다”고 했다. 그의 사망 전후로 만났던 선거철에 반짝 관심 주는 정치인과 달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 중)

노 전 의원은 비유와 유희로, 알기 쉬운 대중 언어로 정치를 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 그의 생각은 법안 발의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2005년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안, 2012년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 2016년 근로기준법 개정안, 2017년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은 노동자 등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노회찬의 의지가 담긴 결과물이었다.

“한국 정치판에…그런 사람이 또 나올까?” 한참이 지나서야 70대인 윤모씨가 긴 한숨과 함께 노 전 의원에 대한 그리움을 내뱉었다.

오피스텔과 빌딩이 숲을 이룬 학동역과 강남 YMCA앞, 선릉역 정류장에서 사람들은 썰물처럼 내려서 흩어졌다. 오전 5시23분, 강남구 개포동 개포고 앞 정류장에 다다라서는 버스에 운전기사와 기자만 남았다. 이날 서울 일출 예정시각은 오전 5시27분으로 ‘투명인간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각자 일터로 들어갔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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