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짓밟은 그들, 우리 가정까지 짓밟았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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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요한 합의 강요에 시달리는 성폭행 피해자 가족

김유진(가명·40·여) 씨는 9월 20일 수원지법 여주지원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떨린다. 막내딸 박소영(가명·18) 양을 성폭행한 조상호(가명·18) 군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온 날이었다. 장기 1년 6개월, 단기 1년 3개월이 선고됐다.

이날 김 씨가 약혼자(41)와 함께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조 군 가족 일행이었다. 그들은 “너 이×× 이리 와 봐”라며 “싸가지 없는 ××”라며 욕을 했다. 웃통 단추를 풀고는 “한번 쳐 보라”며 들이대기도 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당신들이 인간이냐”며 소리를 지르자 가해자 일행이 사라졌다. 김 씨는 화단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현행법상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러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순 없다. 이 때문에 가해자 측은 집요하게 합의를 요구했다. 김 씨가 거절하자 그들은 판결 후에 욕을 퍼부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 군은 여자친구였던 박 양을 불러내 성폭행했다. 2010년 6월이었다. 얼마 후엔 이별을 통보했다. 자신의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박 양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김 씨는 딸이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3개월 뒤에야 알았다.

조 군은 혐의를 부인했다. 가해자 가족도 “우리 애는 거짓말할 애가 아니다.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결국 경찰에 고소했다. 조 군은 “지어낸 얘기다. 소설을 쓴다”고 주장했다. 이 진술은 거짓말탐지기를 통해 거짓으로 나왔지만 조 군은 당당했다.

충격을 받은 박 양은 자퇴했다. 한때는 여군 장교나 경찰관이 되겠다던 소녀. 이 일을 겪으며 자살을 두 번 시도했다. 밤에는 잠을 못 자기 일쑤였다. 조 군이 반성문을 제출한 건 8월이었다.

김 씨는 학교 행정실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수년째 딸 둘을 혼자 키웠다. 공교롭게도 그의 전셋집 주인은 조 군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 조 군 아버지는 김 씨에게 전화를 걸어 “줄 게 있다”고 말했다. 태도가 괘씸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가해자 아버지는 외삼촌과 함께 두 번이나 학교로 찾아왔다. “남의 자식 망쳐봤자 뭐 하겠느냐. 당신들도 조사받으러 왔다 갔다 하면 상처받지 않느냐. 금전적으로든 뭐든 합의를 해 달라….”

이후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혼자 살다가 불륜을 저질러서 누가 따지러 왔다, 빚을 져서 빚쟁이가 찾아온다…. 동료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김 씨는 딸에게 피해가 갈까 봐 대답할 수 없었다.

가해자 가족은 합의를 해 달라며 집으로도 수차례 찾아왔다. 김 씨는 어느 날 문을 열어 놓은 채 청소를 하다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엄마, 모르는 사람 왔어”라는 딸의 말에 나가 보니 가해자 아버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날 박 양은 벌벌 떨었다.

얼마 후 김 씨의 약혼자에게도 연락이 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와서 받으니 “동네 형인데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박 양의 새 아빠가 될 약혼자는 직감적으로 “우리 딸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응답이 되돌아왔다. “할 말도, 만날 일도 없다”고 했지만 전화가 계속 왔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전화를 건 사람들은 김 씨가 사는 건물의 1층 식당에서 가해자 가족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밤늦게까지 11차례나 전화를 걸었다. 만나서 얘기 좀 하자고. 김 씨의 문 앞에 서 있기도 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자 이들은 돌아갔다.

이러는 동안에 사범대 출신인 조 군의 누나는 교사 10여 명으로부터, 친척들은 주민 100여 명으로부터 가해자를 위한 탄원서를 받아 법원에 제출했다.

김 씨는 시도 때도 없이 가해자 측이 학교와 집으로 찾아오면서부터 동네에서 누굴 마주치는 게 무서워졌다.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얼마나 또 시일이 걸릴까. 그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청소년이 성범죄 피해를 당해도 합의해 주면 없던 일이 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합의 문제로 피해자 가족들은 또다시 가해자 측으로부터 2차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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