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배 세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씨는 더 많…
주례를 서기 위해 과거를 깨끗이 닦아 봉투에 넣고 전철을 탔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는 노부부의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가 아주 큰 남편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키가 아주 작은 아내의 말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학동 같다 그렇다, 부부란…
박카스 빈 병은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신다가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금연으로 버림받은 담배 파이프도 그 낭만적 사랑을 냉이꽃 앞에 고백하였다 회색 늑대는 냉이꽃이 좋아 개종을 하였다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긴 울음을 남기고 삼나무 숲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냉…
그대가 별이라면저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그대가 노을이라면 저는 그대 뒷모습을비추어 주는 저녁 하늘이 되고 싶습니다그대가 나무라면저는 그대의 발등에 덮인흙이고자 합니다오, 그대가이른 봄 숲에서 우는 은빛 새라면저는 그대가 앉아 쉬는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새가 날아갈 때 당신의 숲이 흔들린다 노래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봄이 지나가고 벌서듯이 새를 기다리며 여름이 지나가고 새가 오지 않자 새를 잊은 척 기다리며 가을이 지나가고 그래도 새가 오지 않자 기도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겨울이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수히 지나가고…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김상옥(1920∼2004)1970년대에 발표된 초정 김상옥 시인의 시조 한 편이다. 짧고도 간결한 삼행시라 읽기 매끄럽다. 내용상 이 작품은 하나도 슬플 것이 없다. 새…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가슴에 흐르는 한 줄기 실개천 그 낭랑한 물소리 따라 띄워보낸 종이배 누구의 손길인가, 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구의 말씀인가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뉘우침이여. 돌베개를 베고 누운 뉘…
엄마는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중략)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 놓던 장마가 지나갔다 새로 이사 간 집 천장에 곰팡이가 새어 나오듯 석 달 만에 작은 혹이 주먹보다 더 커졌다 착한 암이라고 했는데 악성 종양이었다 엄마는 일주일 동안 구토 증상을 겪었지만 나는 아…
새해가 왔다 1월 1일이 왔다 모든 날의 어미로 왔다 등에 해를 업고, 해 속에 삼백예순네 개 알을 품고 왔다 먼 곳을 걸었다고 몸을 풀고 싶다고 환하게 웃으며 왔다 어제 떠난 사람의 혼령 같은 새 사람이 왔다 삼백예순다섯 사람이 들이닥쳤다 얼굴은 차차 익혀나가기로 하고 다 들이었다…
죽음은 자연스럽다 캄캄한 우주처럼 별들은 사랑스럽다 광대한 우주에 드문드문 떠 있는 꿈처럼 응, 꿈 같은 것 그게 삶이야 엄마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린다 얄브레한 엄마의 숨결이 저쪽으로 넓게 번져 있다 아빠가 천장에 나비 모빌을 단다 무엇이어도 좋은 시간이 당도했다 (하략) ―김…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
높새가 불면 / 당홍 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에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 지팡이 짚고 짚풀을 삼어 /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 슬프고 고요한 /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 황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 그리고 산술도 / 다 잊어버리고 백화를 깎아 /…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