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7월 22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정동의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 불과 며칠 전 3·1운동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이 열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법정에서 불빛에 번득이는 금테 안경을 두른 일본인 검사가 심리를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치안을 방해…
‘나라 잃은 2000만 겨레의 울부짖는 만세의 외침은 기미년 3월 1일을 기해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멀리 해외까지 노도(怒濤)처럼 메아리치며 퍼져나갔다. 때를 같이하여 이곳 산청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3월 21일 거사해 약소민족의 설움을 세계만방에 호소했다. 왜경의 총탄 앞에 쓰러…
저녁 무렵 홍범식(1871∼1910)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을 불러 상자 하나를 주면서 집으로 보냈다. 금산군수로 부임한 홍범식은 고향 충북 괴산을 떠나 관아의 객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가한 김지섭이 열어본 상자에는 가족에게 보내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고향으로 내려가 나랏일을 하시오.” 1919년 2월 말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는 고종 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도착한 박지선, 김현곤, 송수연 등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태인면 출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하 송진우는 3·1만세운동 거사계…
만세시위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가던 1919년, 영호남을 잇는 교통 요충지인 경남 하동군에도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북쪽으로 지리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남해군과 연결되며, 서쪽으로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 광양시와 접한 하동은 각종 물화(物貨)가 모이는 곳이다. 서울…
충남 서천 금강 하구언을 흐르는 강물은 도도했다. 길게 펼쳐진 강은 ‘서천(舒川)’이라는 지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옛 부두에서 10여 분 걸어 내려오면 한영학교(漢英學校) 터가 있다. 지금은 개인 소유의 기와집이 자리 잡은 이곳에서 100년 전 서천의 만세운동을 이끈 젊은이들이…
“3·1운동은 일제의 지배를 거부한 비타협·불복종 운동으로, 19세기 후반 가까스로 제국의 반열에 오른 ‘마지막 근대 제국’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해외 학자 7명 등 국내외 연구자 30여 명이 모여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
‘금일 오등(吾等)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은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절대 지지하고 중앙에 호응하여 완전한 독립 주권국을 전취(戰取)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등은 정의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서명 날…
‘경상북도에서 불령자(일제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의 망동 중에 가장 맹렬했던 영해·영덕지방을 시찰하고 돌아온 경무부장의 말을 들은즉 영해·영덕지방의 망동소요는 대단히 맹렬했으나 요새는 모두 종식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5월 31일…
강원 원주시 봉산로 원주시역사박물관 중앙전시홀에선 ‘3·1운동과 원주’ 특별전시가 한창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원주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의 함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기록물을 선보이는 전시회는 이달 30일까지 계속된다. 박물관은 면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만세운동…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우리의 열화 같은 의지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었으랴.’(안동 삼일운동 기념비) 경북 안동은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한 갑오변란 직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이 일어난 곳이 안동이었다. 공주 유생 서상…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2월 27일 전북 임실군 천도교 임실교구 전도실(운암면 지천리).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北接) 대접주로 맹활약한 최승우, 독립선언서 서명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박준승 양한묵 두 제자를 천도교 측 대표로 천거한 동학 원로 김영원, 공주 우…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1886년 7월 25일 전남 완도군 소안도. 섬 주민 200여 명이 맹선리 짝지에 집단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이 난 지 2개월 뒤 현장을 조사한 일본영사관 직원은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카무라와 그…
‘성격은 강렬하야 애국심이 강하고 기미만세 때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 동아일보 1946년 9월 10일자에 독립운동가 홍진(1877∼1946·사진)의 별세 소식이 실렸다. 그는 1926년 상하이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을 지냈고, 임시정부의 의회 기능을 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