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자 혹은 상류층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 단어는 귀족의 지배를 받는 특정 계급의 이름이었다. 중세 봉건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 계급은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당시 도시의 명칭이 부르(bourg)였으…
만일 당신이 어느 날 경기 과천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캄캄한 전시실 안에 들어갔다고 치자. 환하게 밝은 반대편 벽면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리고 그 아래 대리석 대(臺)에는 하얀 수의를 입은 사람이(아마도 시체가)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맞으며 누워 있다. 물소리 가득한 어둠 속에서 …
프랑스의 한국계 입양아 출신 문화부 장관 플뢰르 펠르랭이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펠르랭 장관은 2012년 봄 입각한 이래 2년 동안 수많은 보고서, 서류, 뉴스를 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역시 여성인…
“바스라지기 직전의 비단, 광택 없는 배경, 기하학적으로 날카롭게 각이 진 사다리꼴의 커다란 검은 관복, 이것은 고요함의 위대한 양식이고, 엄격한 하나의 건축, 또는 절대 기하학이다. 초상화 자체가 ‘영웅’이라는 단어의 표의문자이며 그대로 하나의 상형문자이고, 사자를 저승으로 실어 나…
광화문 앞 광장을 운전하며 지날 때는 우툴두툴한 바닥이 차바퀴와 부딪치는 덜커덩 소리와 요동치는 승차감이 싫다. 유럽 같으면 촘촘하게 돌이 박힌 도로가 로마시대의 흔적이거나 최소한 수백 년 전 마찻길이어서 도시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유산이지만 길이 500m 왕복 10차로의 아스팔트 …
국민은 참으로 피곤하다. 죽는다는 건 모든 인간의 운명인데, 빠르고 느리다는 차이만 있을 뿐 조만간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마련인데, 조금 일찍 조금 많이 함께 죽었다고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을 다그치고 죄의식을 주고 고문할 수 있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얘기하면 즉각 “네 자…
깊은 산 후미진 골짜기나 안개 낀 강물이 가라앉은 색조로 그려진 조선시대 산수화를 보노라면 잊혀진 DNA의 감수성이 일깨워지는 듯 마음이 푸근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의 집은 벽에 둥근 창이 뚫려 있거나 처마 없이 직선으로 경사진 지붕이거나, 여하튼…
“나는 기업을 사랑한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앉은 재벌 총수와 기업인들이 환호를 보낸다. 이어서 “프랑스는 당신들을 필요로 한다!”고 총리가 말하자 다시 한 번 터지는 박수 소리. 지난주(8월 25일) 우리나라 전경련에 해당하는 프랑스경제인연합회(MEDEF) 모임에서 …
참 낭만적이기는 했다. 종래의 그레고리안 달력을 파기하고 1년의 달 이름을 ‘꽃피는 달(플로레알)’ ‘안개 끼는 달(브뤼메르)’ ‘파종하는 달(제르미날)’ ‘찌는 듯이 더운 달(테르미도르)’처럼 계절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바꿨다. 프랑스 대혁명 때의 일이었다. 루이 16세를 단…
반으로 잘린 빵과 나이프, 운두 높은 접시에 가득 담긴 체리와 유리잔, 메주만 한 크기의 치즈 두 덩이, 영롱하게 빛나는 포도, 연두색과 빨간색의 아직 덜 익은 사과들, 냅킨 위에 무심하게 던져져 있는 단단한 껍질의 빵 한 개, 은식기 위에 껍질째 놓여 즙이 마구 흘러내릴 듯 신선한 …
몸이 절개되고 내장이 다 드러나 피가 뚝뚝 흐르는 인체, 입을 크게 벌리고 절규하는 교황, 흠씬 두들겨 맞은 권투선수처럼 부풀려지고 일그러지고 흘러내리는 인간의 얼굴, 십자가에 매달린 거대한 고깃덩어리.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의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인 그림들이다. …
사법시험에 두 번 낙방하고 세 번째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의 실패로 가문의 명예에 한껏 먹칠을 한 상태였다. 유명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수군거리는 고향 사람들의 조롱과 동정을 잠재우기 위해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