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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회고록은 ‘영화에 미친 80년’… 또 영화제 위원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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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회고록은 ‘영화에 미친 80년’… 또 영화제 위원장 합니다”

광주(경기)=손효림 기자 입력 2019-09-03 03:00수정 2019-09-03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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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 이어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맡은 김동호
김동호 씨가 1일 경기 광주시 자택 서재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출범과 성장에 기여한 공로로 에르메스가 특별 제작해 헌정한 가죽 의자에 앉았다. 평소 이 의자에 거의 앉지 않는다는 그는 “내게 부산국제영화제는 자식과 같다”고 말했다. 광주(경기)=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그는 줄곧 허허벌판에 서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건 숙명 같았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BIFF) 전 집행위원장(82)의 삶은 그랬다. 1996년 BIFF를 탄생시키고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키워낸 그는 서울 예술의전당, 남양주종합촬영소, 국립현대미술관, 국악당, 독립기념관 건립 등 일일이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그가 다시 도전에 나섰다. 강릉국제영화제 초대 조직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영화제(11월 8∼14일)까지는 고작 두 달 남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를 수락한 걸까.

팔당호 바로 옆에 자리한 경기 광주시 자택에서 1일 그를 만났다. 두 개 면이 통유리로 된 서재에 들어서자 그림처럼 펼쳐진 팔당호 풍경에 탄성이 나왔다. 그는 “서울 광진구의 아파트에서 38년간 살았다”며 “이곳에 4층 건물을 지어 올해 이사했다”고 말했다. 1층은 이탈리안 식당, 2층은 카페로 임대를 주고 3층은 서재 겸 사무실, 4층은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늘색 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맨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내리고 복숭아를 깎았다. 강릉국제영화제 준비 상황을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고요. 국내에 영화제가 많아 성공하기가 쉽지 않고 실패하면 오명만 남는데 왜 하느냐고 걱정해요. 한데 강릉이란 곳을 차분히 들여다 보니 승산이 보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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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강릉은 국내외 영화인들이 편안하게 쉬면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장소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국내외 영화제 대부분은 행사가 끝나면 참석자들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영화계 이슈에 대해 논의하고 머리를 맞댈 기회가 없어요. 강릉국제영화제에 라운드 테이블을 마련해 국내외 영화인들이 현재의 고민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제 속의 영화제’가 되도록 할 겁니다.”

예술총감독인 김홍준 감독(63)이 프로그램을 짜고 자문위원장인 안성기 씨(67)가 배우들의 참석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해외 영화인을 초청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지난주 일본에 가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고 왔어요. 인지도 높은 영화인들은 연간 스케줄이 다 짜여 있어 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지만 우정을 쌓아온 이들을 중심으로 연락하고 있습니다.”

도전을 즐기는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걸까.

“새로운 일을 마주하면 엔도르핀이 솟아요. 1961년 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들어가 일하다 보니,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기도 한데, 이뤄냈을 때 정말 뿌듯해요. 이게 반복되다 보니 도전이 삶의 일부가 돼 버린 것 같아요. 강릉국제영화제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는지 걱정하는 분이 있는데요, 아주 잘 자고 있습니다.”(웃음)

그의 집은 손님들로 늘 북적인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50)도 마찬가지다.

“칸에서 경쟁부문 진출작을 발표하기 전날 봉 감독이 우리 집에서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다 갔어요. 황금종려상 수상 직후 봉 감독에게 전화로 축하 인사를 건넸어요. 봉 감독이 ‘위원장님 댁에 다녀간 게 좋은 신호였던 것 같다’고 말해 같이 웃었지요.”

그는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은 올해 ‘기생충’의 수상은 낭보 중의 낭보라고 반겼다. 칸, 베를린, 베니스, 모스크바 등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과 수상 연도, 감독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하지만 한국 영화가 새로운 100년을 맞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고 했다.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뒤를 이을 만한 감독이 안 보여요. 인재 풀이 부족한 게 큰 문제입니다. 영화계도 양극화가 심해져 독립영화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걱정됩니다. 독립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상영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예술영화 전용관을 전국에 확대해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우려 속에서도 여성 감독들의 약진은 반가운 현상이라고 했다. 대표적으로 ‘벌새’의 김보라 감독을 꼽았다.

“7월에 (명예위원장을 맡은) 말레이시아국제영화제에서 ‘벌새’를 봤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벌새’는 말레이시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등 3관왕에 올랐고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는 예상치도 못한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했다. 통유리 앞에 놓인 의자 세 개는 그의 영화 인생을 상징한다. 하나는 BIFF 후원사인 에르메스가 감사의 의미를 담아 특별 제작했고, 또 하나는 젊은 감독 모임인 ‘디렉터스컷’이 명예감독으로 추대해 증정했다. 나머지 하나는 그가 감독이 돼 만든 단편영화 ‘주리’(2013년)를 촬영할 때 앉았던 의자다. 그는 장편영화 감독 데뷔도 꿈꾸고 있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장편영화를 꼭 찍어보고 싶어요. 영화 만드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언젠가 술자리에서 배우 박중훈 씨(53)가 묘비에 뭐라고 쓸 건지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영화로 인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미친 놈 여기 누워 있다”라고 답했다. 묘비 내용을 바꿀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박중훈 씨가 갑자기 물어보는 바람에 튀어나온 말이었어요. 저는 눈 감으면 화장해서 수목장을 할 예정이어서 묘비가 필요 없어요. 내년에 회고록을 써서 출간할 계획인데, 책 제목으로 ‘어느 미친놈의 80년’이 어떨까 싶어요. 아, ‘미친놈’이라는 말은 너무 직설적이니까 ‘어느 광인의 80년’이 좋겠네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정확히 알아들을 정도로 청력이 좋았다. 보청기는 물론이고 돋보기 안경도 없다.

“매일 아침 인근 공설운동장에서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해요. 서울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테니스를 했는데 여기로 이사 온 후에는 테니스 코트가 없어서 못 하고 있어요. 그 대신 서울에 갈 때면 테니스를 하죠.”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워 경기고, 서울대를 청량리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다니다 보니 원치 않게(?) 체력을 단련한 덕분인 것 같다며 웃었다.

술은 2005년 1월 1일부터 딱 끊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참석자들과 일대일로 소주 한잔씩을 마시며 눈 맞추고 얘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술이 몇 바퀴를 돌아도 끄떡없을 정도의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혹자는 제게 ‘술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었다. 술로 세계를 제패했다’고도 해요.(웃음) 일을 하고 사람들을 사귀는데 술이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에요. 한데 나이 70이 가까워 오니 이렇게 마셔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곧바로 끊었죠.”

그는 안성기, 강수연 배우 등 오랜 우정을 나눈 이들과 계속 존댓말을 쓴다.

“저보다 나이가 한참 어려도, 알고 지낸 기간이 길어도 이상하게 반말을 못 쓰겠어요. 말을 놓지 않는다고 해서 거리감이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조심하고 예의를 지키게 되죠.”

서재 한 편에는 백남준 씨(1932∼2006)가 1988년 보낸 연하장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TV 모니터처럼 네모 칸을 빼곡하게 그려 색색의 숫자를 써 넣은 작품으로, 예술인과 그의 폭넓은 교류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회고록 출간에 이어 내고 싶은 책이 많다. 서울 예술의전당, 남양주종합촬영소 등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고 지금도 도전을 반기는 것이 가능한 비결이 궁금했다.

“제가 어릴 때는 대통령, 장군이 되겠다며 큰 꿈을 꾼 아이들이 많았어요. 한데 저는 워낙 어렵게 자라서인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너무 멀리 보기보다는 일단 내게 온 기회를 붙잡아 충실하게 해내자는 생각으로 한 걸음씩 걸어왔답니다.”

그의 서재에는 영화 DVD 3000여 장과 영화, 그림 등에 대한 책 1만여 권이 있다. 영화 ‘마부’(1961년) ‘하녀’(1960년)의 복원판도 있다. 서재에는 스크린과 빔 프로젝터가 있어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는 매달 한 번씩 동네 이웃들과 소장한 영화 DVD를 함께 보는 ‘작은 영화제’를 열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 참석하느라 세계 곳곳을 다녔고, 영화도 진짜 많이 봤어요. 운이 참 좋았죠. 제가 쌓은 경험과 지식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제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 김동호 씨 프로필

△1937년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1961년 공보부 입사,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문화부 차관(1992∼1993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1996∼2010년), 영화진흥공사 사장,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은관문화훈장

△(현)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광주(경기)=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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