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지시 무시… 부적응 개인 탓… ‘병영 비극’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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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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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방조 병영문화’ 이대로는 안된다

올해 7월 국방부는 전군에 구타와 가혹행위 등 병영부조리 실태조사를 지시하는 한편 ‘병영생활 행동강령’을 하달했다. 당시 군 당국은 해병대 총기사건을 계기로 고질적 병영악습을 근절하겠다고 했다.

같은 달 광주의 육군 A사단 소속 김모 이병(20)이 입대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목을 맨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19일자 A1면 자살 육군 이병 “말한다고 맞고, 말 안한다고 맞고…”

목숨을 끊기 전 김 이병은 “매일 맞고 혼난다. 자살하고 싶다”고 주위에 호소했고, 가족들도 이 사실을 부대에 하소연했지만 끝내 비극을 막을 순 없었다. 국방부가 구타·가혹행위 근절을 아무리 강조하고 관련 지침을 내려도 일선 부대에선 ‘공염불’에 그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5년 2월 육군훈련소에서 중대장이 훈련병들에게 인분을 먹도록 한 사건을 계기로 국방부가 대대적인 군내 인권개선 대책을 발표한 지 이틀 만에 강원 화천군 육군 모 부대에서 강모 이병(21)이 선임병에게 구타를 당한 뒤 부대 보일러실에서 목을 맸다. 숨진 강 이병의 주머니에선 ‘군대 폭행이 존재하고 욕설이 여전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또 같은 해 6월엔 경기 양주시 육군 모 부대 소속 김모 일병(21)이 휴가를 나왔다가 ‘맞는 것이 두렵다’는 수첩 메모를 남긴 채 충북 청주시의 한 여관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당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전군 지휘관에게 “구타·가혹행위와의 전쟁을 선포해서라도 근절하겠다”는 서신을 내린 지 불과 3개월 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국방부는 그해 10월 최전방 GP 총기난사사건을 계기로 구타·가혹행위 금지 등 ‘병영문화 개선방안’을 다시 전군에 하달했지만 이후로도 구타 가혹행위에 신음하다 끝내 목숨을 버리는 장병이 속출했다.

2009년 4월에는 육군 모 부대 소속 장모 일병(21)이 휴가 중 수첩과 메모장에 ‘OOO이 철모로 때렸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찍었다. 고통스럽고 죽고 싶다’는 글을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국방부가 병사 자살 방지를 위해 전군 차원에서 ‘자살예방종합시스템’을 가동한 지 3개월 만이었다.

군 관계자는 “상부의 구타·가혹행위 엄단 지시가 일선 부대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거나 무시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군의 경직된 문화 탓에 ‘상부 지시 따로, 하부 관행 따로’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구타·가혹행위로 인한 군내 자살이 계속되면서 후진적 병영문화를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부실한 군 의료체계에 이어 구타로 인한 자살사건이 빈번한 군대를 어떻게 믿고 자식을 보내겠느냐는 국민의 불안도 높다.

국방부 통계에서도 군 내 자살의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최근 5년간 군 내 자살자는 모두 395명으로, 자살 건수도 2005년 64명에서 지난해 82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5일마다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병영 비극’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군 내 사망자 가운데 자살자 비율도 1970년대 24.5%에서 1990년 40%, 지난해엔 64%로 늘어 군 사망사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10만 명당 군내 자살자가 12.4명으로 민간인(20∼29세 남성)의 25.3명보다 오히려 낮고, 30년 전과 비교해 자살 건수가 줄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군내 자살의 주요 원인을 ‘복무 부적응’으로 꼽으며 이 문제를 병영문화 차원이 아닌 장병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명령과 규율로 통제되는 군대와 일반인의 자살률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한다. 또 자살이나 총기사건 등 각종 군 사고의 주원인이 구타·가혹행위 같은 병영 폐습이라는 사실을 군 당국이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군이 원래 그렇지’ 하는 일부 지휘관의 안이한 인식과 장병 인권 경시풍조가 구타와 자살로 멍든 병영을 방치하는 주범이라는 지적도 있다.

군 고위 관계자는 “군이 병영사고가 터질 때마다 비난 여론 피하기에 급급해 과거 발표했던 대책을 재탕, 삼탕해 급조해 내놓는 경우가 많다”며 “군 내에서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자살사고→대책발표→자살사고’로 이어지는 병영 내 비극의 악순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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