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여동생 거꾸로 매달고 때리고…내 가슴이 으서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7일 1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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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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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참 건강했어요. 감기 한 번 걸린 일 없었고 밥 한 번 체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주도 비상하다고 선생들이 칭찬까지 했습니다.”

김마리아의 작은 언니 김미렴은 동생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1920년 5월 말 대구의 인터뷰 자리였죠. 원래 동아일보 기자는 김마리아를 직접 만나려고 출장을 갔습니다. 하지만 두 친언니와 지인 등 3명을 만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6월 2일자부터 5회에 걸쳐 이 내용을 연재했습니다. 이중 5회가 친언니들이 말하는 김마리아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작은 언니 말처럼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건강하고 활달했던 모양입니다. 지인이 “천성이 팔팔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집안이 넉넉해 구김살 없이 자랐고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가 마리아를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지어주었다죠. 그러나 세 살 때 아버지가, 열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기사에서 큰 언니 김함라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님까지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한 것은 착각인 듯합니다.

어머니는 “세 자매 중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켜라”라고 유언합니다. 다섯 살, 세 살 손위였던 두 언니는 이 말씀을 뼈에 새겨 뒷바라지했던 든든한 울타리였죠. 세 자매는 어머니를 여읜 이듬해인 1906년 두 삼촌을 따라 고향 황해도 장연을 떠나 한성에서 신교육을 받습니다. 둘째 삼촌 김필순은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쫓기면서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영영 이별합니다. 김필순은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였죠.

<좌> 1920년 6월 6일자 기사에 실린 김마리아 얼굴사진. <우> 1921년 8월 5일자 상하이 탈출 기사에 실린 사진
<좌> 1920년 6월 6일자 기사에 실린 김마리아 얼굴사진. <우> 1921년 8월 5일자 상하이 탈출 기사에 실린 사진

총명했던 김마리아는 모교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1913년의 일이었죠. 이때부터 그는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1918년 도쿄유학생 독립단에 가세하고 이듬해에는 2·8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독립이 먼저라고 여긴 그는 코앞에 둔 졸업도 팽개칩니다. 2·8독립선언서 10여 장을 일본 옷 기모노의 허리띠(오비)에 숨겨 돌아옵니다. 3·1운동을 전후해 곳곳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촉구했죠. 27세 때였습니다.

일제는 이런 김마리아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큰 언니는 “어떻게 몹시 맞았던지 가뜩이나 쇠약한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할 뿐 아니라 귀와 코에 고름이 들었다”고 눈물짓습니다. 작은 언니도 “거꾸로 매달아 죽든지 살든지 함부로 때렸다”라고 한숨을 내쉽니다. 그는 고문 탓에 오른쪽 가슴을 잃었고 코뼈 속에 고름이 차는 병과 신경쇠약을 얻어 평생 고통을 받았습니다.

5개월 뒤 풀려난 김마리아는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회장으로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전국 15개 지방에 지부를 세우고 회원 2000여 명을 확보하죠. 군자금 6000원을 모아 상하이임시정부에 보냅니다. 현재 3억 원에 이르는 돈입니다. 출옥한 지 석 달여 만에 다시 붙잡혀 말하기 힘든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검사 앞에서 “나는 일본 연호는 모른다”라고 대꾸한 것이죠. 다이쇼 8년이라고 하면 넘어갈 일을 1919년이라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체포와 고문, 옥살이로 신경쇠약이 너무 심해져 뼈만 남은 상태가 됐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음식을 못 넘겨 미음만 먹어도 모두 게워낼 지경이었죠. 검사도 보다 못했는지 보석을 허가했습니다. 하지만 친인척과 의료진만 만나도록 제한했습니다. 기자가 그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5회 연재 제목은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였고요.

마리아의 청춘은 아리고 쓰린 싸움의 나날이었다는 큰 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남북으로 동서로 떠돌다 지옥 같은 감옥생활 끝에 병까지 들었으니 가슴이 으스러진다’며 눈물을 훔칩니다. 작은 언니는 ‘보석으로 내보내놓고 감옥보다 더 심하게 자유를 빼앗으니 치료도 효과가 없고 정신적 고통이 더욱더 심하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김마리아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죠. 징역 3년 형을 받은 뒤 일제의 감시가 느슨해진 집행정지 기간에 상하이로 탈출하죠. 현재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 의정원 제10회 회의에서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김마리아는 병마와 고독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독립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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