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지역-시대 뛰어넘어 상처를 보듬는 시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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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베스트셀러]1999년 종합베스트셀러 7위(교보문고 기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류시화 엮음/136쪽·9000원·열림원

1990년대 책들을 여행하다 보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시를 쓰고 에세이를 쓰고 때론 번역도 하다가 남의 글을 엮기도 하는데 뭔가 독특한 일관성과 분위기를 뿜어내는 사람, 절대 실패하지 않는 불세출의 기획자이자 계속 구도인으로 살았던 ‘지구별 여행자’, 바로 류시화다.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
성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작품들은 세속적으로 가장 성공하고야 마는, 성(聖)과 속(俗)이 절묘하게 갈마드는 지점에 늘 그가 있었다. 아마 우리 출판 역사상 이렇게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은 저자는 없었을 것이다.

시작은 시(詩)였다. 대학 졸업 후 중학교 임시교사로 근무하던 중 “시를 써야 할 시간에 자음접변과 구개음화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 괴로웠던” 류 시인은 우연한 만남으로 영적인 내용을 담은 잡지를 만들게 된다. 그 후 정신세계사의 초대 편집장으로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기획, 번역하면서 출판기획자로서도 이름을 알린다. 법정 스님과 틱낫한 스님의 글을 소개하기도 하고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서는 북미 인디언들의 말을 모아 현대인의 삶을 일갈하기도 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를 요리한 것도 그였고,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였다. ‘오쇼 라즈니쉬’ 열풍 뒤에도 그가 있었다. 자신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1990년대 내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무엇보다 시인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원래 갖고 있던 것, 까먹고 있던 것을 언제고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시인은 시간을 길게 늘려 고통스러운 현재 뒤에 덧붙여준다. 끔찍한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깨고 나면 “아, 좀 무서웠지만 재미있는 꿈이었어” 하고 말하게 되리라고. 마지막으로 시인은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오늘 나의 고통은 더 큰 깨달음을 위한 것이고, 나의 존재 또한 타인의 의미 세계를 위한 소중한 계기라고. 서로가 서로를 일깨우기 위한 따뜻한 예정조화의 세계, 그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힘을 얻었고 영혼을 드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 했던 시인의 말을 진정으로 실천한 이가 얼마나 될지 의심하곤 한다. 시인은 아집과 무명의 집을 부수라고 망치를 주었지만, 많은 이들은 그걸 갖고 부서진 자존심의 집을 수리했을 것이다. 혁명가의 사상이 오히려 현 체제의 유지를 돕는 일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작은 나’를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욕망은 1990년대를 넘어서도 자기 상처 핥기에 여념이 없다.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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