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배곯는 가족을 위해 ‘민중의 영웅’이 되기로 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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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피터 케리 지음·민승남 옮김/556쪽·1만6500원·문학동네

네드 켈리는 호주의 저항을 상징하는 국민 아이콘으로, 영화나 책으로 수차례 만들어졌다. 사진은 조지 매케이가 네드 켈리 역을 맡은 영화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올해 영국과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Courtesy of TIFF
네드 켈리는 호주의 저항을 상징하는 국민 아이콘으로, 영화나 책으로 수차례 만들어졌다. 사진은 조지 매케이가 네드 켈리 역을 맡은 영화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올해 영국과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Courtesy of TIFF
2014년 9월. 영국 북부의 스코틀랜드 전역은 주민 투표에 돌입한다. 주제는 바로 이것.

“스코틀랜드가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반대(55.3%)로 결론 났지만 찬성 목소리(44.7%)도 만만치 않았다. 영어로 ‘유나이티드 킹덤(연합왕국)’인 영국은 사실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라는 각기 다른 성격의 지역을 묶어 놓은 곳. 스코틀랜드의 주민 투표는 이 연합왕국의 ‘불편한 동거’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책에서 이 불편한 동거의 ‘원죄’를 만났다.

호주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찢어지게 가난해 15세까지 신발은커녕 양말도 신어본 적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태생 전과자. 19세기 호주는 대영제국에서 추방된 죄수의 유형지였다. 이 중엔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했던 인물도 다수 있었다.

역사를 몰랐던 소년은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하고, 배고픈 가족을 위해 12세에 소를 훔쳐 죽여 버린다. 소고기로 하룻밤의 성대한 만찬이 펼쳐지고, 다음 날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갔다. 소년의 비극은 시작되고, 2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년의 이름은 네드 켈리(1854∼1880)다.

켈리는 호주의 실존 인물이다. 당시 ‘갱(범죄조직)’의 리더로 두 번째 은행 강도를 벌인 뒤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식민 지배하에 없던 죄도 만들어지고, 가진 재산도 빼앗기기 일쑤였던 민중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국주의에 저항한 호주의 국가적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경찰에 맞서 싸우는 그의 모습이 퍼포먼스로 연출되기도 했다.

‘호주인이라면 누구나 네드 켈리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이미 수차례 책과 영화로 다뤄지기도 했다. 책은 영웅적 신화처럼 여겨졌던 켈리의 삶을 피비린내와 쓴맛 나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킨다. 켈리가 생전 정의를 부르짖으며 남긴 ‘제릴데리 편지’가 출발점이 됐다. 작가는 편지를 생애 전체로 확장시켜, 켈리가 미래에 태어날 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적어 내려가는 문서 꾸러미로 만들었다.

켈리의 거친 날것의 삶을 문체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다. 문장 부호가 생략되었거나, 줄 바꿈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곳곳에 있다. 이는 번역의 오류가 아닌 켈리의 캐릭터를 그대로 살린 문체다. ‘제릴데리 편지’에서 포착된 어색한 맞춤법을 작가가 섬세하게 되살렸다. 규칙에 어긋난 불편함에 점차 익숙해지는 과정이 마치 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호주 대자연의 냄새가 물씬 풍겨지는 표현도 눈에 띈다. 인간이 평화로울 때 자연은 아름답지만, 켈리에겐 매정하기만 하다. 사람이 사는 것은 결국 ‘인간애’임을 일깨워준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메마른 사막을 배경으로 했다면, ‘켈리 갱’은 질척한 흙바닥과 말의 이야기다. 저자는 2000년 발표한 이 책으로 ‘오스카와 루신다’에 이어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식민지 비극에서 우리 역사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의 영광 뒤 숨겨진 약탈과 핍박의 역사를 보면, 문제는 한국과 일본 간의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또 다른 버전으로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피터 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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