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K컬처, 그림책 불모지에서 꽃피운 기적[광화문에서/손효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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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영화 ‘기생충’으로 K컬처에 대한 관심이 더 뜨거워지고 있다. 세계인을 사로잡은 K컬처에는 그림책도 있다. 이억배 작가의 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은 지난달 미국 배첼더 어워드 아너리스트에 선정됐다. 배첼더 어워드를 주관하는 전미도서관협회(ALA)는 미국 내 최고 어린이책에 수여하는 칼데콧상, 뉴베리상을 주관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비유하자면 국제영화상을 받은 셈이다. 한국 작가가 배첼더 어워드에서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철조망에 가로막힌 비무장지대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배첼더 어워드 아너리스트 4권 중 한 권으로 이름을 올렸다. 심사위원들은 “야생동물의 피난처인 동시에 군대가 맞서고 있는 곳,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가족. 이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흘러가며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안긴다”고 평했다.

해외에서 큰 상을 탄 한국 그림책 작가는 일일이 꼽기 힘들다. 세계 3대 그림책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볼로냐 라가치상’ ‘BIB상’ 가운데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은 작가로는 정유미 배유정 정진호 조원희 김장성 안영은 지경애 박연철 씨 등이 있다. 2015년에는 볼로냐 라가치상 전 부문에서 한국 작가가 상을 휩쓸어 세계 출판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2년에 한 번씩 그림책 축제를 열고 수여하는 BIB상은 조은영 유주연 한병호 작가가 받았다. 해외에서는 “한국 그림책은 매우 독특하고 역동적이다. 분위기는 동양적이고 기법은 서구적이면서도 실험적이다”고 평가한다.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그림책 작가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독립된 장르가 아니라 아동책의 일부로 분류돼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다. 그림책 작가를 키워내는 학과도, 그림책을 대상으로 한 국내 상도 별로 없다. 권윤덕 작가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는 건 창작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그래야 좋은 작품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림책은 판매할 때도 고민해야 한다. 한 출판사 팀장은 “그림책 독자가 성인으로 확대됐지만 별도 서가가 없어 성인용은 에세이 서가에 배치할 때도 있다. 그나마 논픽션 그림책은 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지만 픽션 그림책은 그럴 수도 없어 어디에 놓을지 매번 고민한다”고 말했다. 독립서점을 중심으로 그림책 코너를 마련해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점이 그나마 고무적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한국 작가들이 거둔 눈부신 성과에 대해 출판계에서는 “기적이다”고 말한다. 작가 개개인의 역량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의미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적만을 바랄 수 있을까. 작가들은 사막 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도 멋스러운 꽃을 힘겹게 피워내고 있다. 이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지원한다면 근사한 꽃이 연이어 피어날 수 있다. K컬처 역시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k컬쳐#기생충#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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