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3·1운동 ‘민족대표 33인’인데 왜 48인이 재판에?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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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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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는 잘 아시다시피 33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사법부는 3·1운동 주모자로 48인을 골라 재판에 넘겼습니다. 33인에 추가된 주모자급이 15인이라는 뜻일까요?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6일자부터 13일자까지 모두 8회로 나눠 예심결정서를 연재했습니다. 괄호 안은 예심결정서에 적힌 직책입니다. 손병희(무직) 최린(보성고등보통학교장)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이상 천도교 도사) 이종일(천도교 월보과장) 나인협 홍기조(이상 천도교 도사) 김완규(무직) 나용환(천도교 도사) 이종훈 홍병기(이상 천도교 장로) 박준승(천도교 도사) 이승훈(기독교 장로파 장로) 박희도(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최성모(기독교 감리파 목사) 신홍식(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양전백(기독교 장로파 목사) 이명용(농업) 길선주(기독교 장로파 목사) 이갑성(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사무원) 김창준(기독교 북감리파 전도사) 이필주(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오화영(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박동완(기독교 신보사 서기) 정춘수 신석구(이상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한용운 백용성(이상 승려) 안세환(평양 기독교서원회 총무) 임규(무직) 김지환(기독교 남감리파 전도사) 최남선(서적출판업) 함태영(기독교 장로) 송진우(중앙학교장) 정노식(무직) 현상윤(중앙학교 교사) 이경섭(농업) 한병익(누룩제조판매업) 김홍규(보성사 공장감독) 김도태(무직) 박인호(천도교 대도주) 노헌용(천도교 금융관장) 김세환(삼일여학교 교사)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생도) 김원벽(연희전문학교 생도) 유여대(기독교 목사).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었지만 재판을 받은 사람은 31인이었습니다. 천도교 직무도사였던 양한묵은 감옥에서 숨졌고 기독교 목사인 김병조는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판을 받은 48인 중 민족대표를 빼고 남은 주모자급은 17인이 됩니다. 이들 중 모의단계에 참여했던 사람은 최남선 함태영 송진우 현상윤 정노식 김도태 박인호 노헌용 김세환 9인이었습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함태영은 기독교 서명자들이 체포됐을 때 가족들을 보호하기로 해 서명하지 않았죠. 송진우와 현상윤은 3·1운동 구상에 불을 당긴 뒤 천도교와 기독교를 연결해준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정노식과 김도태는 기독교 인사들의 연락에 앞장섰고요, 박인호와 노헌용은 천도교가 기독교에 5000원(약 2억5000만 원)을 지원할 때 실무자였습니다. 김세환은 3·1운동 전 충남 및 경기 수원군과 이천군에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모으다 나중에 붙잡혔죠.

이어 실행단계에서는 안세환 임규 김지환 김홍규 이경섭 한병익 강기덕 김원벽 8인이 각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안세환은 일본 도쿄에 가서 경시총감을 만나 조선독립의 이유를 전달했습니다. 임규 역시 도쿄에서 독립선언서와 의견서를 내각과 귀족원, 중의원에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도쿄에서 검거됐죠. 김지환은 기독교측이 미리 상하이로 보낸 현순 목사에게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의견서를 우송하고 돌아오다 남만주철도 백마역에서 붙잡혔습니다.

김홍규는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인쇄한 책임자였고 이경섭과 한병익은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수안군에서 붙잡힌 천도교도였습니다. 강기덕과 김원벽은 3월 1일 당일 학생들을 동원한 지도자였죠. 특히 이 두 사람은 나흘 뒤인 3월 5일 제2의 독립시위를 주도해 남대문역 앞에서 인력거를 탄 채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 예심결정서는 고등법원이 1919년 12월 20일에 제출했습니다.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보내 재판하라는 결정을 실었죠. 이에 앞서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도 예심을 끝내고 결정서를 써냈습니다. 경성지방법원은 48인 사건이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관할인 고등법원이 재판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등법원은 48인 사건이 내란죄나 내란교사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다시 경성지방법원으로 보낸 것입니다. 경성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이 마치 핑퐁게임을 하듯 사건을 떠넘겼던 것이죠.

그렇다면 예심이라는 제도는 뭘까요? 예심은 일제 강점기에만 있었던 형사소송법 절차였습니다. 19세기 프랑스에 있던 제도를 일본이 직수입했고 조선을 강점하면서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검사가 예심을 청구하면 판사가 수사를 하고 조서를 꾸며 면소하거나 기각하거나 재판에 넘깁니다. 판사가 수사와 재판을 모두 하는 형식인 셈이죠.

그런데 예심판사는 수사를 하면서 피고인을 붙잡아 둘 수 있었습니다. 법에는 구류 기간을 2개월로 한다고 했으면서도 특별한 필요가 있으면 갱신할 수 있다고 규정해 사실상 기약 없이 가둬둘 수 있었죠. 48인을 기준으로 하면 경성지방법원이 예심절차를 진행하면서 5개월 붙잡아두었고 고등법원 역시 예심을 진행하면서 5개월 가까이 발목을 잡아두었습니다. 이 기간은 나중에 형기가 확정돼도 빼주지 않았습니다.

예심제도는 수사기능에 집중하면 피의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수단이 되고, 구속기간을 줄이고 재판에 넘길지를 엄격하게 판단하는데 초점을 맞추면 인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양날의 칼인 셈이었죠. 그런데 일제는 이 예심제도를 조선의 사상범들에게 고통을 주는 수단으로 악용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예심을 거쳤던 ‘딸깍발이’ 이희승은 회고록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곧 시작된다던 예심은 한 달이 넘도록 기척이 없었다.… 형사들은 우리에게 “빨리 조사를 받고 넘어가는 게 신상에 좋다”고 공갈을 쳤었다. 예심이란 몇 년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것이니 고분고분 자백을 하고 하루빨리 넘어가는 게 좋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예심에 넘겨진 14명 중 2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습니다. 33인 중 예심 기간에 목숨을 잃은 양한묵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고등법원의 예심결정서에는 법률가들이 보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일제 사법부 법률가들은 아니고 변호인들이 보기에 그랬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예심결정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지닌 법률가라면 어느 진영에 소속됐건 잘못됐다고 인정할 만한 문서였습니다. 실제로 1920년 7월 13일 시작된 재판에서 이 잘못이 공식 제기돼 재판 진행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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