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 실패한 ‘부린이’, 그들이 쏟아내는 분노방정식[광화문에서/염희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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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희진 산업2부 차장
염희진 산업2부 차장
“‘부린이’ 탈출하고 싶어요.”

현재 90만 명이 가입된 한 부동산 관련 온라인 카페에는 이런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부린이(부동산+어린이)는 이제 막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초보 투자자란 뜻이다.

부린이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지인들이 사뒀던 집이 몇 년 새 수억 원씩 뛰는 것을 보며 뒤늦게 매수에 나선 실수요자들이다. 또 다른 유형은 더 나은 ‘급지’로 갈아타려는 부류. 일명 갈아타기족으로 학군이 좋은 지역이나 오를 만한 호재가 있는 곳으로 옮겨보려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는 한 채 더 사서 시세차익이나 임대수익에 도전해 보려는 투자형 부류가 있다.

현금 부자가 아닌 이들은 주로 모아놓은 자금에 대출을 보태 집을 사 왔다. 그런데 이제는 온갖 대출을 실행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해야 집을 살 수 있게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영혼을 동원해야 할 만큼 서울 집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서울 전체 아파트를 가격순으로 줄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 가격(중위가격)이 2017년 말 6억85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9억 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 정부가 12·16부동산대책을 내놓으며 주택담보대출을 조였다. 이들은 신용대출, 비상금대출, 마이너스통장, 가족대출 등 갖은 틈새 대출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린이가 대출만큼이나 어려워진 분야가 바로 청약이다. 2, 3년 전만 해도 청약은 부린이가 집을 살 수 있는 일반적인 통로였다. 하지만 청약제도가 가점제 위주로 재편되고 고득점자가 몰리며 당첨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이제 부린이는 ‘줍줍’이라는 우회로에 몰리고 있다. 줍줍이란 청약 진행 후 미계약 미분양건을 통장 없이 가져가는 무순위 청약을 뜻한다. 주변 시세보다 낮은 분양가에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르면 수억 원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경쟁률은 1만 대 1을 넘어섰다.

대출과 청약의 좁아진 틈새를 실감하며 부린이가 좌절할 즈음, 정부는 최근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부린이들은 또 한 번 혼란에 빠졌다. 내가 영끌해서 집을 사려는 행위가 혹시 투기란 말인가. 집을 통해 자산을 늘리는 행위가 왜 나쁠까. 다들 그렇게 살아온 거 같은데 왜 나만 막는 걸까. 이때 등장한 또 다른 신조어가 ‘내자남기(내가 하면 투자, 남이 하면 투기)’다. 어차피 정부조차 투기에 대한 명확한 원칙과 기준을 내세우지 않았으니 내가 가는 길이 옳다는 일종의 ‘정신 승리’이자 방어기제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주택 보유 수에 따른 분노방정식이 화제다. 몇 년 전 집을 판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1주택자, 다주택자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가 나타나 있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다주택자는 무주택자를 멍청하다고, 무주택자는 다주택자를 나쁘다고 생각한다. 1주택자와 무주택자가 만나면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다주택자와 전 유주택자가 만나면 큰 전쟁이 난다.

수차례 정책을 내놔도 자꾸만 오르는 서울 집값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미워하는 집단 분노가 시작된 것 같다. 정부가 쏘아올린 부동산 전쟁의 화살이 정작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이것이 지금 부동산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웃픈’ 현실이다.

염희진 산업2부 차장 salthj@donga.com
#광화문에서#부린이#부자#대출금#청약#주택보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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