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조작 이어 음원 사재기 의혹… K팝 신뢰에 흠집[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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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경연 프로서 촉발된 위기
일부 가수, 사재기 겨냥 “정직해야”
음원 실시간차트 시스템 허점 노려… 조작업체 “상위권에 올려주겠다”
‘화제성 출연자 섭외=순위권 보장’… 가요계선 ‘오디션 장사’ 논란 꾸준
“차트 다변화-감시기구 필요… 리뷰어 인증제 등 논의할 때 왔다”

임희윤 문화부 기자
임희윤 문화부 기자
‘Sajaegi(사재기).’

‘오빠(Oppa)’와 ‘언니(Unni)’, ‘애교(Aegyo)’ 같은 한국어가 가볍게 통용되던 해외 케이팝 커뮤니티에 최근 새로 등장한 단어다. 국내 음원 서비스에서 10년 이상 유령처럼 떠돌던 음원 사재기 관련 의혹과 논란이 해외에서도 확산하는 추세다. 새 발화점은 최근 블락비의 멤버 박경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차트 최상위권 가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사재기 의혹을 제기한 것. 이어 마미손이 신곡에 ‘기계를 어떻게 이기라는 말이냐’란 가사를 넣었다. 또 4일 일본에서 열린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에서 세계적 스타 방탄소년단의 멤버 진이 수상 소감에서 “조금 더 정직한 방법으로 음악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발언하면서 더 많이 확산됐다.

구글 검색창에 영어로 ‘차트 조작(chart manipulation)’을 쳐 넣으면 케이팝이 자동 추천으로 따라붙을 정도다. 엠넷 ‘프로듀스 101’ 조작 논란까지 겹치면서 이중 생채기를 입은 케이팝 브랜드의 신뢰도가 급전직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복마전의 한가운데, 믿을 사람 없다”

“솔직히 이제는 ‘피아 식별’조차 안 됩니다. 했는지, 안 했는지를 제작자들끼리도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니 복마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 듭니다.”(가요기획사 이사 A 씨)

이 문장 속 ‘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에서 목적어는 사재기다. 의혹은 있되 실체는 없는 연기와 같다고, 매캐한 냄새는 나는데 굴뚝마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최근 만난 가요 제작자 대부분은 SNS 바이럴 마케팅 제안을 받으며 음원 사재기에 대한 암시나 직접적 언급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처음 들어보는 업체에서 가요 제작자들을 찾아와 ‘수천만 원을 주면 멜론 차트 상위권에 올려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수년 전. SNS 바이럴 마케팅이 떠오르면서 제안은 때로 더 대담하거나 은밀해졌다고 했다.

“멜론 순위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쪽 업체 사람이 ‘다년간의 노하우가 있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페이스북에서 팔로어 수십만을 거느린 인기 채널에 ‘이 노래 죽인다’는 식으로 동영상 링크를 게재하는 식이라고 해요. 돈을 더 쓸수록 순위를 더 올려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가요기획사 대표 B 씨)

인디 밴드를 제작하는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SNS 마케팅도 하지만 그것은 ‘이것 봐라, SNS에서 터진 곡이다’라며 순위 급반등 명분을 쌓는 구실에 불과하며 음원 역주행의 진짜 동력은 불법적인 방법이라는 귀띔을 들었다”고 했다. A 씨는 “멜론 톱 100에 있는 가수 가운데 40명 정도는 실제 인기나 화제도와 동떨어진 순위에 올라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 ‘차트가 먼저냐, 인기가 먼저냐’

일부 가수의 음원 사재기 의혹은, 대중의 음악 소비가 디지털 음원 서비스로 몰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상존했다. 멜론 등 유료 음원 서비스사들은 이동통신사 가입 조건 결합 할인 등 파격 조건을 내세워 순식간에 전 국민의 절반을 음원 서비스로 불러들였다. 1분마다 인기 곡 순위를 보여주는 실시간 차트도 이내 도입했다. ‘어떤 노래가 인기 있는가’ ‘요즘 유행가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중적 답이 기존의 음반 판매 집계 대신 ‘멜론 차트’로 귀결하기 시작했다. 띄우려면 일정 정도 이상 유명해져야 하는데 그 수단으로 멜론 차트만 한 게 없게 된 것이다. ‘차트 줄 세우기’ ‘7개 차트 정상’ 같은 문구도 가수의 신곡을 홍보하는 최대의 무기가 됐다.

이런 시장 상황 속에 사재기 의혹이 계속해 불거졌다. 2013년에는 SM·YG·JYP엔터테인먼트 등 기획사들이 음원 사재기 브로커를 검찰에 고발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최근에는 SNS 마케팅 업체가 가수 매니지먼트에 직접 뛰어들면서 논란을 더 키우는 양상이다. 몇몇 업체는 실제로 음원 차트 상위권 가수를 연속해 양산하면서 가요계의 시선을 받고 있다. 윤동환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부회장은 “이들 업체가 불법 행위를 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포털 사이트의 개인 블로그 마케팅에 적용되는 규제조차 받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업체가 의혹을 불식할 데이터를 공개하거나 제도적으로 감독할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부에서도 팔을 걷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해 콘텐츠공정상생센터를 열고 불공정 거래 피해 신고와 모니터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요 업계에서는 근본적 해결책으로 실시간 차트 없애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음원 사재기는 물론 일부 아이돌 팬들의 어뷰징 역시 실시간 차트 순위를 올려 ‘내 가수’를 띄우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스포티파이 등 해외 음원 서비스 역시 인기 차트 항목을 갖고 있지만 실시간 대신 일간이나 주간 집계를 하며, 국내 서비스처럼 메인 페이지 상단에 지속적으로 노출하지도 않는다.

○ 일부 방송사의 이상한 계약

‘워너원’ ‘아이즈원’ 등 글로벌 아이돌 그룹을 배출한 엠넷(Mnet) TV 경연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순위 조작 논란 역시 케이팝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순위 조작 이전에는 ‘악마의 편집’ 논란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가 사전에 연습생이나 가수의 소속사와 합의해 특정 참가자를 더 돋보이게 편집하고 있다는 의혹이었다. 음원 사재기와 비슷하게 당시에도 “방송국에서 화제성 있는 참가자를 찾으면서 우리 연습생을 출연시키면 예선 통과를 보장하겠다는 듯한 암시를 받았다”는 가요계 증언들도 나왔다. ‘슈퍼스타K’ 등이 인기 속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지만 실체가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런 논란과 의혹 뒤에는 일부 방송사의 ‘오디션 장사’가 있었다. 오디션 우승자나 입상자가 프로그램 종영 뒤 활동을 할 때 특정 매니지먼트사와 독점적 계약을 맺도록 하는 관행이다. 행사 출연료나 음원 수익 등을 놓고 방송사 25%, 매니지먼트사 25%, 가수와 소속사가 50%를 가져가도록 계약을 맺는 식이다. 방송계에서는 여기서 매니지먼트사 역시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미리 접촉해 ‘세팅’하는 것이 관례라는 말이 나온다. 25% 이상의 수익 지분을 방송사가 가져가며 가수나 소속사와 공생하는 시스템이 불공정한 시스템에 대한 유혹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 가요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 인기의 유혹… 자율정화, 감시제도 마련돼야

인기도 조작 논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2012년 영국 BBC에서는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1962년 비틀스 데뷔 싱글 ‘Love Me Do’ 수천∼수만 장을 불법으로 사재기했다는 의혹을 당시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제시했다. ‘Love Me Do’는 당시 영국 싱글차트 17위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1991년 바코드를 통한 음반 판매량 집계 시스템인 ‘사운드스캔’이 나오기 전까지 차트 조사의 상당 부분이 구두나 서면으로 이뤄졌다. 사운드스캔 시대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는 ‘내 가수 띄우기 전략’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음원 서비스 ‘타이덜’에서 인기 래퍼 카녜이 웨스트, 가수 비욘세의 음원 차트 반등에 대한 불법 의혹이 불거져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유명해서 유명해지기, 인기 있어서 더 팔리는 현상은 대중문화계의 오랜 현상이자 ‘에덴 동산의 사과’였다. 윤호정 세종대 교수는 “(음원과 방송) 플랫폼 등 정보를 더 가진 자가 조작을 통해 정보를 덜 가진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양상을 줄이기 위해 리뷰어 인증제 등 감시 기능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음원 서비스의 메인 화면에서 차트를 없애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서비스 업체 관계자들은 “이미 가입자들의 소비 패턴이 차트에 정착해 없애기 힘들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차트는 유지하되 여러 메뉴 중 하나로 두고 소비자가 보고 싶을 때 보게 하거나 개인별 맞춤 차트를 도입하는 것 등 다양한 해결책이 있다. 실시간 차트에 목을 매는 대신 장르나 시대별 노래 추천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차트 다변화를 통해 엔터테인먼트적 기능도 제고할 수 있다. 수천만 사용자가 수년 동안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에 관한 빅데이터를 가진 업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방송국에서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시청자들을 TV 앞에 앉히고 입술과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의 힘, 그 자체에 다시 집중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40년 장수 프로그램인 KBS ‘전국노래자랑’처럼 말이다.

임희윤 문화부 기자 imi@donga.com
#사재기#음원 차트#오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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