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뇌물 요구 끊을 방법 있다[오늘과 내일/신연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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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재판부 뇌물 거절할 방법 요구
이사회 독립성 등 기업 개혁이 답이다

신연수 논설위원
신연수 논설위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을 맡은 재판부가 또 숙제를 냈다. 6일 공판에서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가 “기업이 정치권력의 뇌물 요구에 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삼성그룹 차원에서 해결책을 제시해 달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10월 첫 재판에서도 “실질적인 기업 내부 준법감시제도가 필요하다”고 주문했었다.

정 부장판사의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업이 권력자의 뇌물 요구를 거절할 방법은 있다. 기업의 의사결정을 총수 마음대로 못 하게 하면 된다.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경영 투명성을 높여 총수나 경영자가 불법적이거나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지 않도록 견제하면 된다. 그러면 대통령이 총수를 밀실에 불러 뇌물을 요구해도 시스템적으로 총수 마음대로 기업 돈을 쓸 수 없다. 이런 제도와 기업문화가 정착되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권력자들이 아예 뇌물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전체 지분의 2∼5%를 가진 지배주주(보통 그룹 총수와 가족)가 직접 경영을 하면서 이사회까지 장악하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총수 중심의 경영은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으로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정치권력이 연관돼 국가의 자원을 몇몇 기업에 몰아주고, 대신 정치자금을 받는 정경유착의 폐해를 낳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게 된 건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경영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전자투표제,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사외이사 규제 강화 등을 추진해왔다.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사 선출을 쉽게 하고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해 지배주주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고 스튜어드십 코드를 만들어 비리 경영자를 막으려는 것도 같은 취지다.

그런데 일부에서 ‘경영권 침해’니 ‘기업 옥죄기’ ‘연금 사회주의’라면서 반대해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고 경영자는 주주들의 대리인일 뿐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주주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주주권을 행사하는 데 경영학 교과서에도 없는 ‘경영권’의 침해나 보호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는 이사회에 의해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잡스 사후에는 그의 자녀가 아니라 능력을 검증받은 전문경영인 팀 쿡이 경영을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다. 선진국에 정경유착 비리가 거의 없는 것은 그들이 더 선량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유착을 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해 기업의 회계투명성이 조사 대상 63개국 가운데 62위(스위스 IMD 발표)로 꼴찌 수준이다. 이사회 안건의 원안 가결이 99.6%로 이사회가 여전히 총수의 거수기 노릇만 한다는 비판이 많다. 한국 기업들이 실적에 비해 주가가 낮은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여전한 것은 불투명한 기업 경영이 큰 몫을 차지한다.

한국 기업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1등 공신이지만 이제는 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변해야 한다. 이사회 독립과 주주총회 내실화 등은 기업을 외부 정치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경영 투명성을 높여 기업을 발전시키는 길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 개혁안 중에서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일부 조정하더라도 개혁 자체를 반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세계 1등 기업들답게 경영투명성도 한발 앞서 세계 1위로 높이는 것이 옳다. 5년, 10년 뒤에 또다시 대기업 총수들이 정경유착 비리로 법정에 서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이재용#뇌물#국정농단#정경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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