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반복하는 쳇바퀴 법정, 근원 해결하는 치유법원[광화문에서/김재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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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사회부 차장
김재영 사회부 차장
4일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 법정에선 특별한 졸업식이 거행됐다. 한국 법원에서 처음 시도한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친 피고인에게 법원은 실형 대신 집행유예의 선물을 줬다.

30대 A 씨는 음주 뺑소니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3개월간 술을 끊고 오후 10시까지 귀가하라는 조건으로 보석을 결정했다. 숙제를 잘하고 있는지 매일 동영상을 찍어 올리게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A 씨는 “프로그램 첫 참여자로서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미술놀이를 하는 등 동영상엔 가족의 웃음이 묻어났다. 103일 동안 써내려간 금주일기엔 삶의 변화가 담겼다. A 씨는 “아예 술을 끊겠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믿음직한 남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교도소로 보냈다면 이 같은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을까.

재판부가 색다른 실험을 한 것은 수사와 기소, 판결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형사사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반성에서다. 특히 마약 음주 등 중독에 따른 범행은 아무리 처벌해도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저서 ‘어떤 양형 이유’에서 회전문을 돌듯 법정을 드나드는 피고인에게 판사는 “무표정하게 출소와 입소 시기를 결정하고 절차를 안내하는 회전문 집사일 뿐”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에선 이미 치유법원(Treatment Court), 문제해결법원(Problem-solving Court) 등으로 불리는 제도가 정식 운영되고 있다. 미국에선 1989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에 약물치유법원이 설치된 게 시초다. 이후 재범률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약물 정신건강 가정폭력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됐다. 2014년 말 현재 미국 전역에서 4300여 개의 치유법원이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치유법원에선 판사와 검사, 변호인, 보호관찰관, 사회복지사, 전문상담인, 의사 등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 범행을 불러온 행동이나 습관, 질병을 고치기 위해 맞춤형 처방을 내리고 사법당국의 감독하에 치료와 훈련을 수행한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형사법원으로 넘기고, 숙제를 잘 마치면 처벌을 면하게 해준다.

물론 치유법원이 만능은 아니다. 엄벌이 필요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준다거나 법원이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질병마다 다양한 처방전이 필요하듯, 우리 법원도 형벌 외에 또 다른 보완적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도움이 절실하고 의지가 있는 대상자를 잘 골라낸 뒤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고 제대로 감독, 평가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우선 시범사업을 확대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해 정식 도입을 논의해 볼 만하다.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마치고 재판부는 “이제 작은 씨앗 하나를 뿌린 것”이라고 했다.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우리 법정이 단죄하기만 하는 차가운 법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는 따뜻한 법정의 역할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재영 사회부 차장 redfoot@donga.com
#치유법원#음주 뺑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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