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짝 하고 빛날 때[동아광장/김이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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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변해가는 사람들… 자존감 있어야 유연함도 성숙
선을 넘는 이들에 상처 받을 때 대부분 우리는 참고 넘기곤 해
불쾌한 상황, 참는 게 능사는 아냐… 가끔은 ‘나를 위한 정색’ 필요하다

김이나 객원논설위원·작사가
김이나 객원논설위원·작사가
통속극에서 지나치게 많이 등장해서 종종 패러디로나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이러지 마. 이건 너답지 않아.”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나 또한 쓰면서도 왠지 부끄러운 대사였지만, 문득 정색을 하고 생각해 본다. ‘나다운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한다’는 말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모순 속에 공존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변한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해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에는, 정확히는 그 사람은 변하는 데 실패했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며 변해가는 데에는 크게 두 줄기가 있는 것 같다. 굳어져 가는 변화, 흐름에 따르는 유연한 변화. 내가 생각하는 긍정적 변화는 후자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변화에는 단단한 심지가 척추처럼 버티고 있다. 자존감이라는 건 어쩌면 이 척추일지도 모른다.

울타리 없는 마당처럼 선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 울타리라는 것이 대단하지 않아서, 정색을 하기엔 애매한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너는 이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 애니까’ ‘너는 항상 유쾌한 애니까’라는 칭찬을 가장한 무심한 규정들 때문에 상처받지 않아 본 사람이 있을까. 내게서 자신에게 편리한 면만을 보고 기억하여 아주 살짝, 티 나지 않게 나를 불편한 상황으로 떠미는 순간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며 나의 작은 불쾌함을 해소하기보다는 한 번 선을 밟혀주는 쪽을 택한다.

나는 이때가 바로 내가 나다워질 수 있기를 포기하는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불쾌하고 무례한 사건은 명쾌하게 해결된다. 그러나 평균 정도의 사회성을 갖춘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대개의 불쾌한 순간들은 미미한 습도와 온도 차이로 결정된다. 이때에 유난스럽고 예민한 사람이 되기 싫은 마음, 이 마음은 결국 나를 버리면서 그렇다고 타인을 위하는 것도 아닌, 오직 나에게만 마이너스가 남게 만든다.

나를 몰라주어 서운하고, 오해해서 서운해하기 이전에 나는 나를 어떻게 방치하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본다. 무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내 가장 약한 부분을 내버려두진 않았는지. 심지어 알아서 그곳에 굳은살이 박여 주길 바란 무책임함은 없었는지.

이 세상 모두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내게 중요한 사람들에게만큼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약간의 불편한 상황에 그에 적당히 걸맞은 ‘방청객스러운’ 리액션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굳이 화를 내지 않아도, 예를 들어 불쾌한 농담에 크게 웃어주지 않는 것, 또는 누군가의 험담을 들을 때 맞장구치지 않고 듣기 싫은 내색을 하는 게 그런 거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런 ‘정색이 필요한 순간’은 내가 두려워했던 만큼 결과가 대단히 나빠지지도 않았다. 가장 좋았던 점은, 이런 순간에 내가 잘 지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걸러진다는 거였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만은 아니다. 단지 나 스스로 어딘가를 계속 상처내면서 만날 필요 없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서서히 남겨지는 나의 사람들, 그리고 나의 테두리.

이 과정 끝이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영원히 평온한 시간이길 바라진 않는다. 그건 흡사 무균실 속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이런 작은 노력들로 인해 나는 서서히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완벽하지 않지만, 어떤 모양을 갖춘 나를 알아가는 이런 과정들이 더 이상 예전만큼 어렵지 않다. 내가 ‘반짝’ 하고 모양이 갖추어지는 순간은 무언가를 감수하고 정색할 수 있을 때다. 그리고 누군가의 정색이 내겐 조금 납득하기 어려울 때,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사람의 모양이 지켜지고 있는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김이나 객원논설위원·작사가
#자존감#상처#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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