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숙제 없는 ‘아이들의 아지트’… “마음껏 놀때 창의력도 자랍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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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나눔]도심 속 아이들의 휴식 공간, ‘이문238’ 만든 이재준 건축가

24일 서울 동대문구의 ‘이문238’에서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대표가 아이들이 만든 다양한 작품을 앞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이 공간은 방과 후 학생들이 찾아와 자유롭게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해피라운지’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24일 서울 동대문구의 ‘이문238’에서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대표가 아이들이 만든 다양한 작품을 앞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이 공간은 방과 후 학생들이 찾아와 자유롭게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해피라운지’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노 어덜트 존(No adult Zone).’

유리벽을 경계로 단절된 이곳엔 오직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 가위와 풀, 각종 만들기 기구와 재료들이 담긴 서랍장이 미로처럼 줄 세워진 공간이다. “오늘은 종이컵으로 돼지저금통을 만들어보자”며 일일이 가르치는 교사는 없다. 각자 원하는 것들을 만들 뿐이다. 누군가는 A4용지를 여러 장 이어 붙여 만화를 그리고, 또 다른 아이는 먹다 버린 우유팩으로 꿈꿔왔던 자동차를 만든다.

서울 동대문구 신이문로에는 이처럼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는 ‘이문238’이란 공간이 있다. 건축가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대표(48)가 기획한 곳이다. ‘이문동 238번지’라는 지번주소를 그대로 살린 이름이다. 하지만 ‘하나의 문을 강요하지 않고 238가지 서로 다른 문(異門)을 연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24일 오전 이문238에서 이재준 대표를 만났다.

○ 학교-학원, 그 가운데 ‘쉼표 공간’

“많은 부모가 아무 할 일 없는 상태로 아이를 내버려두는 것을 불안해하죠. 놀 때도 어떤 장난감을 쥐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아이들은 혼자서 놀 수 있습니다.”

세 아들을 키우는 아빠인 이 대표는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건축가로서 주거문제 해결 등 공공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17년 이문238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문초등학교 바로 앞에 넓은 땅을 갖고 있던 한 자산가가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임대해 줄 테니, 아주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들어 운영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게 계기가 됐다.

‘초등학교마다 가까운 곳에 아이들의 해피라운지가 있으면 어떨까.’ 그는 학교가 끝나고 집이나 학원에 가기 전 아이들이 의미 있는 ‘지금’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총 555m²에 이르는 이곳은 아이들이 창작활동을 하는 작업실과 야외 테라스, 음악실, 명상실, 도서실, 영상실, 조리실 등 총 7가지 공간으로 구성됐다.

공간의 일부는 자녀를 데리고 온 학부모나 동네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카페로 개방해 수익을 얻는다. 그 대신 유리벽을 경계로 구분된 ‘해피라운지’는 철저히 아이들만 입장할 수 있다. 키즈카페보다 저렴한 1시간 6000원(종일권 1만2000원)을 끊고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 저소득층 자녀에겐 무료로 공간을 개방한다.

○ 놀 때 아이디어 샘솟는 아이들

어린이가 자신만의 달력을 만들고 있다(왼쪽 사진). 해피라운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는 모습. ‘이문238’ 홈페이지
어린이가 자신만의 달력을 만들고 있다(왼쪽 사진). 해피라운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는 모습. ‘이문238’ 홈페이지
해피라운지엔 어떤 명령이나 간섭이 없다. 처음에 이곳을 찾는 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시간을 보낸다. 유리창 너머 지켜보는 학부모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미로처럼 늘어선 선반에 놓인 각종 만들기 도구들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몇 가지 재료를 챙겨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그림을 그리든, 시를 쓰든, 인형을 만들든 자유다. 작업 진행상황은 노트에 기록한다.

이 대표는 “아이들은 놀 때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말하며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나무젓가락과 고무줄로 ‘새총’을 만들던 아이들이 ‘멀리 쏘기’ 게임을 만들어 놀고 있었다. 옆에서 유심히 관찰하던 한 여학생이 갑자기 ‘과녁’을 만들었다. “멀리 쏘는 것 말고, 정확히 쏘는 걸로 1등을 가리자.” 자신의 창의력으로 게임의 룰을 바꿔버린 셈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워주기 위해 인위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창의성 교육은 ‘지금’을 행복하게 보내며 놀이하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샘솟는다는 게 이 대표의 주장이다.

○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아이가 큰 도화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문238’ 홈페이지
아이가 큰 도화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문238’ 홈페이지
이 공간에는 세 자녀를 키운 다둥이 아빠의 교육철학이 담겨 있다. 컴퓨터 게임을 못 하게 했더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스스로 게임을 만들어 즐기던 첫째 아이는 6학년이 되자 무료 모바일 앱을 제작해 광고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적성에 맞는 정보기술(IT) 분야 특성화고에 다니며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대표는 “수익을 용돈으로 쓰게 했다”며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때 깊이 몰입하고 성장한다”고 말했다.

본래 작업실만 있던 이문238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 ‘행복얼라이언스’ 회원사들의 기부금을 통해 다양한 시설들을 추가했다. 또 행복도시락협동조합의 협력으로 아이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갖췄다.

이 대표는 “지금은 한 곳이지만, 모든 초등학교 앞에 해피라운지를 하나씩 만드는 게 회사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라며 “특히 학원가가 밀집된 지역의 초등학교 앞에 이런 공간이 생긴다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이문238#해피라운지#행복얼라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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