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실수하지 말길…” 국민타자의 자기반성[광화문에서/이헌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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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팬들에게 사인 잘해 주시나요?”

“아뇨. 잘 안 해줍니다.”

“이유가 뭔가요?”

“너무 많이 해드려서 아무래도 사인의 희소성이 떨어지는 거 같아서요.”

몇 해 전 전파를 탄 동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이승엽(43)은 고개를 숙였다. 동영상이 끝난 뒤 마침내 고개를 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선배인 제가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이승엽은 7월부터 이달 초까지 퓨처스리그(2군)에서 뛰는 후배 선수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순회강연 프로그램 이름은 부정행위 예방을 위한 ‘퓨처스 홈런 투어(Futures Home-Learn Tour)’였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태도, 소양을 배운다(learn)는 의미로 기획됐다.

KBO리그 최다인 467홈런을 치며 ‘국민타자’로 불렸던 이승엽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가 있다. 바로 팬 서비스를 둘러싼 논란이다. 이승엽은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12차례의 강연 동안 매번 같은 내용을 말하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이승엽을 지켜봐 온 기자의 눈으로는 이승엽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8년간의 일본 프로야구 생활을 마치고 2012년 한국으로 복귀한 이승엽은 야구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그해 21홈런을 치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2014년에도 32개의 홈런을 날렸다. 은퇴 마지막 해이던 2017년에도 27홈런을 쳤다.

하지만 그도 선수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잘하는 날이 있으면 못 치는 날이 있었다. 3할을 치면 좋은 타자라는 소리를 듣는 야구에서는 잘하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기 마련이다.

하지만 잘 치는 날이건 그렇지 않은 날이건 경기 후 라커룸에 돌아오면 사인을 기다리고 있는 몇 박스의 공이 놓여 있었다. 그는 당시 “이러다 사인 노이로제에 걸리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때마침 논란의 인터뷰를 전후해 그의 사인공이 온라인을 통해 적지 않은 금액에 거래된다는 말이 돌았다. 평소 팬 서비스에 인색하지 않았던 이승엽이 돌발적인 말을 내뱉었던 배경이다.

한 번 튀어 나온 말의 여파는 오래갔다. 은퇴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이승엽과 관련된 기사에는 어김없이 부정적인 댓글이 달린다. 이른바 ‘희소성’을 비꼬는 글이 대부분이다.

그는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 큰 실수를 했다. 팬들이 있기에 우리 같은 선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었던 것 같다. 후배들은 절대 나처럼 못난 선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으로 강연 프로그램에 해당 내용을 넣었다”고 했다. 이 밖에도 강연은 자신이 일본에서 겪었던 어려움, 힘들었던 2군 시절 등 성공보다는 실패담이 주를 이뤘다.

나라 안팎으로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고도 이를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이승엽은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룬 사람이 실수를 저지른 후 보여줄 수 있는 품격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만 희소성 논란에서 그를 놓아줘야 하지 않을까.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이승엽#kbo#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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