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6월 항쟁에 미적지근한 文정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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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민주화 이룬 위대한 6월 항쟁
이념·계층 구분없이 온국민이 비폭력 참여
촛불은 혁명이라는 與, 6월은 혁명이라 안해
대통령 기념사엔 뜬금없이 野 겨냥 내용도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시위대, 뿌연 최루가스…. 홍콩 시위 장면을 TV로 보다 보니 32년 전 이맘때 6월 민주항쟁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사실 당시 한국의 시위는 홍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5공화국 내내 경찰의 시위 진압은 요즘 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시위대는 비폭력을 지켰다. 요즘 진보진영은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폭력 시위였다고 예찬한다. 하지만 경찰이 집회를 보장해주고 누구든 집회참가로 인한 불이익에 대한 조금의 걱정도 없이 참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비폭력으로 진행한 촛불집회와, 경찰이 집회 자체를 봉쇄하고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최루탄과 곤봉을 휘두르며 마구 연행해 가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기방어권마저 포기한 채 비폭력을 외친 6월 항쟁의 비폭력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6월 항쟁은 그렇게 위대한 명예혁명이었다. 4·19, 5·18로 이어져온 민주화 투쟁의 완성을 이룬 혁명이었다. 여러 젊은이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수천,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는 제3세계식의 유혈 사태 없이 군부정권의 영구집권 야욕을 꺾은, 세계사에 남을 비폭력 혁명이었다.

그런데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은 올해도 조용히 지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32주년 기념식도 행정안전부 장관을 보내 기념사를 대독하게 했다. 물론 올해는 북유럽 순방 때문에 불참했다고 이해하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기념사 내용이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뜬금없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좋은 말을 골라 사용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미덕”이라고 했다. 자유한국당의 막말 논란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 정치성 발언을 기념사에 굳이 넣었어야 할까. 아무리 그 시점에 꼭 표명하고픈 정치 현안 의견이 있었다 해도 정말 중차대한 기념사라 여겼다면 끼워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촛불집회를 촛불시민혁명이라고 입만 열면 강조하는 이 정부와 여당에서 6월 항쟁을 혁명으로 부르자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회 발전에 미친 영향과 역사적 의미, 그것이 이뤄지기까지의 희생과 노력으로 볼 때 6월 항쟁의 의미는 촛불집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집권세력은 지난해 영화 ‘1987’ 열풍 때를 제외하곤 6월 항쟁에 대해선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

6월 항쟁은 학생 중산층 야당 재야 종교계 문화계 등이 총결집해 이뤄낸 것이고, 촛불집회는 초기 조직화부터 진행까지 한국진보연대 등 좌파단체들이 중심이 됐다. 6월 항쟁은 보수 진보 구분이 무의미한 온국민의 민주화 투쟁이어서 좌파가 온전히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문재인 정권에 지분을 주장하는 핵심 그룹들은 그래서 6월 항쟁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세력이 6월정신에 부끄럽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6월정신은 유신과 5·17쿠데타로 빼앗긴 대통령 선출권 회복, 고문 강제연행 노동3권 탄압을 일삼는 군부독재의 종식,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실현이었다. 직격탄과 강제연행을 무릅쓰고 거리를 메운 학생들, 시위대를 향해 티슈 뭉치를 던져주고 물병을 갖다 준 직장인들, 경적을 울려대던 택시 기사들 모두가 염원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의제와 시스템에 의한 통치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대중을 상대로 한 직접민주주의, 선동정치의 담을 수시로 넘는다. 정당 해산 청원에 호응해 국민 심판을 당부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행태도 그 한 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을 없애달라는 요구는 아무리 세(勢) 과시용이라 해도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발상인데 청와대가 그에 편승해 정치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시스템을 다중의 선동적 에너지로 압박하려는 포퓰리즘적 행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과 가치의 상대성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 해석마저 자신들의 코드에 맞추려 하고, 코드와 배치되는 것들에 권력을 동원해 불이익을 주는 행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선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그렇게 외치면서도 막상 검찰 경찰 인사의 중립성 확보는 외면하는 것도 제왕적 권력의 분산이라는 민주주의 정신에 배치된다.

자유한국당 대표가 6월 항쟁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한심스러운 일이다. 6월 항쟁은 좌파만의 투쟁이 아니라 학생과 중산층이 주축이 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주역이었다. 나라의 진로를 놓고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이럴 때일수록 6월 항쟁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홍콩 시위#6월 항쟁#촛불집회#민주주의#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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