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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버림받은 스파이 [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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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버림받은 스파이 [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 입력 2019-06-13 14:00수정 2019-06-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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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이복형으로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살당한 김정남 말입니다.

암살 당시 김정남 독살 이유는 잠재적 권력 경쟁자를 살려둘 수 없다는 3대 세습정권의 비정함에 초점이 맞춰졌었죠. 김정남 암살은 집권 직후부터 유효했던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실행 전까지 지속적으로 유효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명령) 였다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김정남은 CIA 스파이였다”

이번에 새롭게 조명을 받은 내용은 김정남이 서방 정보기관과 광범위하게 접촉해 왔다는 주장입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베이징 지국장이자 북한 전문가인 애나 파이필드 기자는 최근 펴낸 책 ‘위대한 계승자(The Great Successor)’에서 “김정남이 CIA의 정보원이었고 김정은은 미국 스파이와의 접촉을 배반행위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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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구체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파이필드는 “피살된 김정남의 백팩에서는 미화 12만 달러 현금다발이 발견됐다”며 정보를 넘기고 받은 돈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습니다.

김정남 스파이설에는 보수적 성향의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동조했습니다. WSJ는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남과 CIA 사이에 연계가 있었다”며 “김정남이 CIA 요원과 접촉하기 위해 2017년 2월 말레이시아로 갔다”고 보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입니다. 1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CIA 연루설을 언급한 뒤 “내 체제 아래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확실하다”고 말했습니다.

거의 반면 만에 김정은의 친서를 받았다는 것을 자발적으로 공개한 뒤 나온 내용이었습니다. 정보당국을 동원해 체제에 위협이 되는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로 김정은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입니다. 다만 전임 정부 시절 김정남이 CIA 등 정보기관의 공작 대상이었음을 은연중 시인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채널A 제작팀의 취재에서도 김정남과 CIA 연루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김정남은 쿠알라룸푸르에서 멀리 떨어진 랑카위의 한 호텔에서 미국 정보요원을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언론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찍힌 김정남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에겐 ‘계륵’ 같았던 김정남

사실 김정남은 미국은 물론 우리 정보기관의 관리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김정남은 2001년 도미니카 위장여권을 들고 일본의 도쿄 디즈니랜드에 놀러가려다 추방된 뒤 베이징과 마카오 등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 김정남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종종 동선(動線)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2001년 도미니카 위조여건으로 일본에 밀입국 하려다 적발된 김정남 (맨 왼쪽)과 그의 가족.
2000년대 취재현장을 누빌 당시 복수의 정보당국 관계자들과 김정남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를 간략히 메모해 보면 이렇습니다.

“김정남은 이미 후계구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백두혈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냥 방치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김정남은 우리가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예 데려오면 어떠냐고? 그건 아니다. 중국이 어느 정도 보호를 하고 있고 북한에서도 쉽게 암살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냥 어느 정도 거리만 두고 적당히 지켜보는 게 났다. 김정남을 데려오면 그건 남북관계를 끝장 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데려올 정도의 정보가치가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

이 말에 김정남의 비극적 상황이 압축적으로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퇴색해 버렸고, 망명을 받아주기에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어버린 계륵(鷄肋) 같은 인물.

2001년 이후 김정남의 동선은 언론에 자주 노출됐다. 마카오에서의 가족식사, 파리의 한 호텔, 그리고 SNS 속 김정남(왼쪽부터).
김정남 본인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레이시아에 사는 일본인 친구에게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며 차량과 운전기사가 필요하다고 긴급 SOS를 쳤다는 사실이 채널A 현지 취재결과 확인됐습니다.

또한 김정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일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명령을 취소해 주길 바랍니다. 피할 곳도 없고, 도망갈 곳은 자살 뿐입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피나는 몸부림은 결국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물론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마저 사실상 버림받은 비운의 황태자의 최후는 그렇게 처참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베일 속의 스파이 행각

김정남이 미국의 CIA는 물론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99.99%로 여겨집니다. 정보기관이 김정남을 접촉하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오히려 직무유기로 볼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적극적인 스파이 행각을 벌였는지, 그것 때문에 김정은이 김정남을 암살했는지에 대한 진위여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외교문서나 국가기밀에 관한 자료는 25년이나 30년이 지나야 공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정남 공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부자의 폭로가 나온다면 많은 사람의 궁금증이 해소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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