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당한 유진박, 후견인 있었지만 없어진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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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6월 12일 14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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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모가 신청했지만 제3자 후견인 지정되자 돌연 취하
“일방적 취하로 보호 못받는 상황 막기 위해 제도 개선 필요”

MBC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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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44)이 최근 매니저인 김모씨에게 거액의 사기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우울증과 조울증 등을 앓고 있던 유진박에게 법적 후견인이 있었다면 사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2년 전 법원이 유진박의 후견인을 지정했었지만 돌연 신청이 취하돼 후견인 선임이 무산됐었던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끈다.

사연은 이렇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세를 떨치던 유진박은 2000년대 들어 우울증 등으로 활동이 뜸해졌고,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어머니까지 사망하자 정상적인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자 미국에 살고 있는 유진박의 이모 A씨가 2016년 6월 서울가정법원에 자신과 유진박의 고모 B씨를 후견인으로 지정해달라고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했다.

2013년 7월 시행한 성년후견제도는 치매노인이나 발달장애인 등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법률행위와 일상생활을 후견인이 돕는 제도다. 후견인의 업무 처리는 법원의 관리·감독을 받게 된다.

서울가정법원은 2017년 6월 해당 신청을 받아들여 유진박에 대한 성년후견을 개시했다. 다만 후견인으로 A씨와 고모 B씨가 아닌, 전문후견인인 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이 선임됐다. 그러자 A씨는 개시결정이 있은지 6일 만에 돌연 청구를 취하해 후견인 선임이 무산됐다.

민사나 행정소송 등 일반 사건은 당사자가 사건을 취하한다는 의사를 밝히더라도 상대방이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취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이 없는 성년후견사건 같은 비송사건은 심판결과가 나오더라도 신청인이 심판이 확정되기 전 취하 의사를 밝히면 아무 제약없이 취하가 된다.

서울시장애인인권센터가 고발한 내용에 따르면, 김씨가 사기 범행을 시작한 시기가 2016년이었다. 2017년 6월 후견인 선임이 무산되지만 않았더라도 좀 더 빠른 시일에 피해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소 취하만 하지 않았다면 유진박이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A씨도 조카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자 크게 후회하며 새로운 후견개시 신청을 위한 위임장을 법률대리인에 전달했다고 한다. A씨는 김씨가 취하를 종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후견인이 필요한 사람들의 친인척들이 후견개시를 신청했다가 자신들이 후견인으로 선임되지 않으면 신청 자체를 취하해 후견인 선임을 없던 일로 하는 경우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가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된 2013년 7월부터 2016년까지 4년여 동안 서울가정법원에 제기된 성년후견개시청구사건 중 청구인의 취하로 사건이 종결된 362건을 조사한 결과, 사건 본인이나 친척 간의 분쟁으로 취하가 된 경우가 77건(21.3%), 감독 등 개입회피 목적인 경우가 15건(4.2%)으로 성년후견이 필요한 사건 본인의 복리와는 상관없는 사유로 취하된 경우가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하 사유를 알 수 없는 ‘사유불명’인 경우가 212건(58.5%)에 달해 친척 간 분쟁이나 법원의 감독 회피 목적으로 취하하는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유진박의 경우처럼 신청인의 일방적 취하로 정작 후견이 필요한 사람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 신청인의 일방적 취하를 막기 위해 가정법원의 허가를 얻어 취하하도록 하는 내용의 가사소송법 개정안이 2017년 9월과 지난해 3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논의의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김 변호사는 “자유롭게 취하를 허용하면 후견이 필요한 정신장애인 등의 신상과 재산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거나 이에 대한 (법원의) 개입이나 감독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사건 심리과정에서 사건 본인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법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지방자치단체와 검찰에서 후견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후견심판을 청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철웅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범죄 피해자인데 후견이 필요한 경우에는 사건을 조사하는 검찰에서 재빨리 나서 가정법원에 후견을 청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며 “범죄 피해가 나지 않더라도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어 지역 사회에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는 지자체가 나서 후견신청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지자체가 치매노인이나 발달장애인들에 대해 공공후견( 성년후견이 필요한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정부가 직접 법원에 성년후견인 지정을 신청하고 후견인 보수 등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제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치매노인의 경우 저소득·독거여야하고 우울증 환자 등에게는 아예 공공후견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고 있다”며 “이를 위해 성년후견 제도를 민법에만 규정해 놓을 것이 아니라, 검사와 지자체장이 적극적으로 후견 사건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행정법에 근거법률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배광열 사단법인 온율 변호사도 “신청인도 헌법상 재판청구권이라는 권리가 있는데 이를 법률로 제한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라며 “신청인들이 취하할 경우 최후의 최후로후견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 즉 지자체나 검사가 적극적으로 후견개시 청구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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