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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매일 출산중”… 짧은 詩로 풀어낸 찰나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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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매일 출산중”… 짧은 詩로 풀어낸 찰나의 단상

이설 기자 입력 2019-04-18 03:00수정 2019-04-18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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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시편’ 펴낸 김형영 시인
김형영 시인은 “가톨릭 주보에 4행짜리 시를 기고하면서 짧은 시를 쓰는 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김형영 시인 제공
“‘아, 한 역사가 이렇게 불타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랜 세월 쌓인 기도들이 재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로 불탄 다음 날인 17일. 김형영 시인(74)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그의 전화 수화기에서 통화연결음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흘러나왔다.

문단에서 가톨릭 신자로 잘 알려진 그는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대해 깊은 상실감을 표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프랑스의 복원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하니, 다시 찬찬히 역사를 쌓아올려야겠지요. 한국도 문화재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고, 산불도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를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최근 펴낸 아홉 번째 시집 ‘화살시편’(문학과지성사·9000원)의 제목도 가톨릭의 ‘화살기도’에서 따왔다. 순간의 단상을 기도로 옮기듯, 찰나의 직관을 10줄 이내의 짧은 시로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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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79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이유 없이 찾아온 특발성혈소판감소증으로 고생하던 시기에 가족과 성당을 찾았다. 날카롭던 시도 온화해졌다. 이번 시집에는 신앙의 영성이 곳곳에 녹아 있다. 첫 시로 실린 ‘서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실린 기도문과 관련된 전설에 나오는 바닷가 소년과의 대화를 참조해서 썼다.

‘바닷가 모래밭에/한 아이 구덩이를 파서/바다를 담고 있네./조개껍데기로 퍼 담고 있네.//“바닷물을 다 담으려고요.”/“그건 불가능하단다.” 일러주어도/아이는 계속해서 퍼 담고 있네.’(‘서시’)

이번 시집의 절반은 봄을 노래한다. 나무의 새순과 언 땅에 싹을 틔우는 대지에서 ‘자연은 매일 출산 중’이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는 “봄도 자연도 하느님”이라며 “요즘 가톨릭을 거쳐 범신론자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노점상하고 흥정하는 저 사람/우리 동네/부잣집 마누라 아녀?’(화살시편 27―노점상)

1980년대 중반 가톨릭문인회 문학의 밤 행사장에서 김수환 추기경(가운데)과 함께한 김 시인. 김형영 시인 제공
가톨릭문인회장을 맡았던 김 시인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에서 ‘노점상’이라는 시의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강론은 시대의 핵심을 콕콕 찌릅니다. 종교와 예수를 들먹이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면서 노점상과 흥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실천적인 삶의 태도가 단박에 와 닿았죠.”

그는 ‘시는 청춘의 장르’라는 속설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50년째 ‘고래동인’ 멤버인 윤후명 강은교 등과 술잔과 시심을 나눈다. 김 시인은 젊은 시는 번뜩이고 새롭지만 풋사과에 가깝다며 자만하지 않으면 갈수록 농익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시인도 때로 명예와 허영으로 움직이죠. 명시를 남기고 싶어 50년간 영혼을 파먹고 살았는데, 이제야 조금 집착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는 이번 시집이 ‘좋은 시’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써낸 첫 시집이라고 말했다.

“긴말 않고 짧은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으니 아기의 옹알이 같은 언어를 고르고 솎게 되더군요. 성인들의 직관은 따라갈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속(俗)과 멀고 성(聖)에 가까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김형영 시인#화살시편#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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