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형준]WTO 패소 후 일본 메시지, 한일 갈등 오히려 부추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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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일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판정 결과를 접한 것은 공식 발표보다 약 3시간 앞선 11일 오후 9시경이었다. 승소를 당연시하던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패소’ 소식에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외무성은 승소를 전제로 미리 만들었던 ‘한국은 국제법에 근거해 적절히 대응해 달라’는 문구를 자료에서 급히 지워야 했다.

기자는 다음 날 일본이 내놓을 공식 반응을 눈여겨봤다. 강제 징용, 독도 영유권 등 한일 간 이슈가 나올 때마다 “국제법에 따라 처리하자”고 반복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 (후쿠시마 인근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철폐를 요구해 가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12일 오전 1시 16분 고노 다로 외상 담화)

“1심의 판단을 취소한 것은 아니다. 일본이 패소했다는 말은 맞지 않다.”(12일 오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기자회견)

이상했다. 두 장관의 메시지에 ‘패소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내용은 없었다.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게 뻔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정부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동북지방 부흥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있다. WTO 최종 판정은 동북지방 어민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다. 장관들이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정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란 뜻이다. 그렇기에 무리수를 두더라도 국내용 메시지를 발신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16일 아랍 주일 대사들과의 친목회에서 “후쿠시마 쌀을 매일 먹고 물도 마셨다. 그래서 자민당 총재 3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다소 과장을 담은 것도 마찬가지다.

맥락을 읽어야 하는 메시지가 또 있다. 14일자 도쿄신문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에 문재인 대통령과 양자 정상회담을 추진하지 않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용된 정부 당국자 발언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특정 정부 인사가 언론에 의도적인 메시지를 흘린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강 대 강’ 대치를 부담스러워하던 한일 정부는 물밑에서 접점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가 G20을 계기로 한 관계 개선이다. 조현 외교부 1차관은 12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G20 정상회의에 문 대통령이 참석할 것으로 전망하며 “어려운 문제도 정상 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실무자로서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류를 감안해 보면 일본 측 인사가 한일 정상회담 불가능을 일본 언론에 흘렸을 때 그의 혼네(本音·속마음)는 다음 부분에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G20 정상회의까지 남은 두 달여 사이에 한국이 일본에 대한 강경 자세를 누그러뜨린다면 아베 총리가 필요에 따라 문 대통령과 회담할 가능성도 있다.” 해석해 보면 “우린 가만있을 테니 한국 정부가 태도를 바꾸라”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한일 관계는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이 지금처럼 국내용 메시지, ‘한국만 태도를 바꾸면 돼’라는 메시지에만 집착한다면 한일 관계는 지금의 악화된 상황에서 현상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것 같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wto 승소#일본 수산물#후쿠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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