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정몽구 회장의 역발상 승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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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경영이 중대한 상황을 맞을 때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부수를 던져 위기를 타개해 왔다. 1998년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정관리 중인 기아차를 인수해 글로벌 메이저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고, 그 이듬해 미국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10년, 10만 마일 보증제도’를 도입해 현대차의 품질에 대한 인식을 일거에 바꿔놓은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차그룹이 지난달 28일 내놓은 지배구조 개편안에서도 ‘승부사 정몽구’의 면모가 드러난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내용은 시장이 예상했던 바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순환출자가 재벌그룹 총수 일가의 지배권을 유지하고 승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룹은 현대차그룹 하나뿐”이라며 콕 찍어 압박을 해오던 터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깜짝 놀란 것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예상해온 지주회사 체제 대신 사업지배회사 체제를 선택한 점이다.

정 회장이 양도세를 1조 원 이상 절약할 수 있는 지주회사 카드를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지주회사는 금융계열사를 거느릴 수 없다는 규제 때문에 현대캐피탈을 매각해야 하는데, 현대캐피탈은 현대·기아차의 판매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할부금융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둘째, 현대모비스가 지주회사로 바뀌면 자회사인 현대차와 손자회사인 기아차는 투자와 인수합병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M&A를 통해 격렬한 지각변동이 이뤄지고 있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기아차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지주회사는 지배구조의 유일한 정답도 아니고, 경영 성과를 담보하는 제도는 더더욱 아니다. 지난해 10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롯데그룹은 롯데카드 등 8개 금융계열사 처분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롯데카드를 처분하면 유통사업에 적지 않은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 일본에는 중간금융지주회사 제도가 있어서 소니 같은 제조업체들이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계열사를 ‘지주회사 우산 아래’ 거느리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지주회사 제도는 이런 유연성이 없다. 기업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볼 때 정 회장이 지주회사 체제를 피한 것은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선택이다.

현대·기아차의 이번 지배구조 개편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이 지배구조의 정점인 현대모비스의 대주주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이로써 정 부회장은 그룹 내에서 활동공간이 크게 넓어졌다. 지금까지 정 부회장의 조심스러운 행보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승계 준비가 가장 안 된 그룹”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생산해왔다. 정 부회장의 역할 확대는 시장의 걱정을 덜어주는 동시에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요즘 현대차와 기아차의 품질에 대해서는 “벤츠나 렉서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승차감에 비해 하차감(차에서 내릴 때 주위에서 던지는 부러운 시선에 대한 느낌)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직은 대체적인 평가다. 승용차를 살 때 브랜드 평판과 디자인 등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향은 젊은 층일수록 강하다. 품질에 대한 정 회장의 집념에 정 부회장의 젊은 감각이 더해져야만,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중시하는 소비자 시류(時流)에 현대·기아차가 올라탈 수 있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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