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바엔 비례대표 의원은 없애는 게 맞다[오늘과 내일/이승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도입 취지 전혀 못 살린 비례대표
어떻게든 금배지만 달면 되는 건가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나는 돈을 두 배로 줘도 지역구 의원은 못 하겠다.”

얼마 전 비례대표 초선 K 의원이 총선에 불출마하겠다며 사석에서 한 말이다. 주변 평가가 좋고 정무적 감각이 뛰어나서 도전했다면 공천을 받았을 인물. 왜 못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천성이 게을러서 지역구 관리 못 하겠더라”고 했다.

K 의원 말처럼 정치권에선 같은 국회의원이라도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은 다르게 본다.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치열한 공천 경쟁, 특히 지역구 관리를 해냈느냐의 차이를 감안한다는 얘기다. 봄철이면 꽃구경 가는 관광버스 뒤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들고, 주말엔 하룻밤에 서너 군데 상갓집을 들르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누구는 지역구에서 바닥을 기며 유권자들과 소통하고, 누구는 고상하게 의원만 하는데 어떻게 등가(等價)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매 총선마다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크게 두 가지다. 정당이 선거에서 얻은 표, 그러니까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의석수에 가급적 반영하겠다는 게 하나다. 또 다른 이유는 지역구 의원들로는 부족한 각 분야 전문가들을 국회에 보내겠다는 것. 다양한 입법 활동을 유도하고 다방면에서 정부 정책을 견제하라는 게 핵심 임무다. 지역구 의원은 정치 베테랑이지만 전문 지식이 부족하거나 특정 분야를 대표하지 못할 수 있으니 비례대표로 보충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도 47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대급 졸속 창당과 막장 공천에 이어 공약 베끼기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는 지금의 상당수 비례대표 정당의 후보들은 선거에 나설 이유나 자격이 없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 반영이라는 첫 번째 취지는 위성정당 등장 이후 벌써 너덜너덜해졌으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과연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해 어떻게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바꾸겠다는 비전이나 구상을 제시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각 당 비례대표 후보들은 뭐라고 답할 수 있나.

미래한국당,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국민의당 등 비례대표 후보만 낸 정당의 정책이나 공약 중 선거 이슈가 된 것은 거의 없다. 총선 후 모(母)당인 민주당과 다시 합체하는 더불어시민당이 두 차례 공약을 만들었다 고쳤다를 반복한 게 유일하게 이슈가 됐다. 나머지는 공약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향후 입법 절차나 정교한 소요 예산 추산은 빠진 채 지지층만 겨냥한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비례대표 후보들은 대부분 정치 새내기다. 그래서 각 당에서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하기에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장관급 대우를 받는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뽑히려고 각자 얼굴을 내밀면서 이 난장(亂場)을 그냥 침묵하며 선거가 끝나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무치(無恥)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필자는 16대 총선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째 총선을 취재하거나 관찰하면서 “역대 최악의 국회” “국민은 1류인데 정치는 4류”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심경이 복잡했다. 그래도 엄연히 정치만의 역할이란 게 있는데, 온갖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저주를 뿜어댈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비례대표 막장을 지켜보며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변명도 어렵게 됐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1대 국회의원 1명이 4년 임기 동안 쓸 세금은 37억7100만 원이라고 한다. 새로 뽑을 47명의 비례대표가 쓸 1772억3700만 원이 벌써부터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비례대표 의원#4·15총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