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하는 조국발 적폐청산 시즌2[오늘과 내일/정연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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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惡에 맞서면 다 정의라는 착각… 과오 성찰 없는 진영논리는 오판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2014년 8월 야당 의원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하던 자리에 놓여진 책 한 권이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 운동가인 파커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었다. 문 대통령이 작년 여름휴가 때 읽었다고 소개되자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비통한 자들’로 의역된 사회적 약자와의 공감능력이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민주화세력의 적자를 자처해온 문재인 정권에 이 공감능력은 독보적인 정치적 자산이었다. 자연스레 이 성역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세력에 수구반동, 꼴통이란 낙인이 찍혔다. 기저엔 선악의 대결 구도가 작동했다. 이 정권에서 조선시대에나 들을 법한 적폐청산이란 구호가 통용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러니 거악(巨惡)을 상대로 ‘의로운’ 전쟁 중인 민주화세력의 잘못이 있다면 논할 가치도 없는 소소한 것으로 치부됐다. 진보좌파 진영의 비리나 문제점을 지적하면 수구보수, 반동세력을 돕는 이적행위로 몰렸다. 보수 진영이 넘볼 수 없는 공정·정의 가치와 공감능력의 정치적 자산은 필승 카드처럼 보였다.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검찰 수사 대상이 검찰 업무를 관장하는 장관이 된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윤석열 검찰은 검찰 개혁의 타깃이 됐다. 여권은 ‘수사는 수사, 개혁은 개혁일 뿐’이라고 하지만 검찰을 겨냥한 적폐청산 시즌2를 재연하고 있다. 검찰은 거악, 조국은 그 거악을 응징하는 ‘절대선’으로 치환되고 있다.

하지만 조국이 꺼내든 피의사실 공표 금지, 검찰 조직 문화 혁신 과제가 그렇게 절절했다면 이 정부 출범할 때부터 왜 손도 대지 않았는지 여권 인사들의 설명은 거의 없다. 이전 정권을 상대로 한 검찰 수사 방식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물론 없다. 그러면서 검찰 개혁을 외치니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조국 일가 비리를 수사하는 윤석열 검찰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일 것이다. 조국 사태에서 이미 공정·정의의 가치는 무너졌고, 국민들과의 공감대도 끊어졌다. 조국 임명 강행으로 진영 대결이라는 새 판은 짰지만 빈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조국 사태를 보면서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 직후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러시아 혁명 직후 제국주의 열강에 포위된 사회주의 요새 러시아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팽배했다. ‘포위된 요새’ 수호라는 명분 아래 러시아 내부에서 지도부를 공격하는 웬만한 행위는 이적행위가 됐다. 비판과 성찰을 아우르는 당내 민주주의도 용납될 수 없었다. 결국 폭압적인 스탈린 독재의 실상은 흐루쇼프의 1956년 스탈린 격하 연설로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후 러시아 몰락의 원인(遠因)이 됐다. 진보좌파 진영의 역주행을 보면서 드는 이런 섬뜩한 생각이 기우(杞憂)이길 바란다.

앞서 문 대통령이 읽었다는 책에서 파커 파머는 지금의 진보좌파 진영에도 적용될 만한 진단을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신념과 모순되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면,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옹호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여러 연구가 보여준다. 자신의 확신과 가치에 누가 도전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원할 것이다.”

이미 국민적 심판이 끝난 조국 사태는 진보좌파 진영에 눈을 감고 싶은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가치와 공감능력의 두 축이 무너졌으니 조국발 검찰 개혁의 울림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기와 독선으로 뭉친 진영의 벽을 깨고 나와야 할 때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조국#적폐청산#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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