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복수를 하려면 아일랜드처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1일 12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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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문재인 정부는 성공했다.

작금의 일본 처사가 옳다는 건 아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가 옳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정부 대응을 비판하는 제 국민을 청와대가 친일, 토착왜구를 넘어 이적(利敵)이라고 공격하는 건 옳지 않다.


●한일갈등 확대하면 국익에 도움 되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기는커녕 이참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NIA)도 적폐로 몰아 깨버리겠다는 것도 불길하다. 한미일 3각 군사협력에 이어 한미동맹까지 청산해서는 3·1절 기념사대로 ‘신한반도 체제로 담대하게 전환해 통일을 준비’할 태세다.

올해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용산구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올해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용산구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잘못된 과거를 성찰해야 미래로 갈 수 있다”며 “민족정기확립은 국가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했을 때는 3·1절이니까 의례 나오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섬뜩하다.

민족정기가 뭔데 그걸 확립하는 게 국가의 책임과 의무란 말인가. 과거 100년과는 질적으로 다른 ‘체제 전환’을, 그것도 담대하게 왜 하겠다는 건가. 일본과 ‘경제전쟁’을 치르면서 한일 군사협력도, 한미동맹도 깨버리고 남북통일로 가려고…계속 문제를 확대시키는 건 아닌가.


●우리는 일본을 앞설 수 없나

식민지 종주국에 당한 분함과 억울함으로 치면, 영국에 700년 지배받은 아일랜드가 우리 뺨칠 거다. 그 나라가 지금 영국보다 엄청 잘 산다. 2018년 1인당 국민소득이 8만4000달러로 영국의 거의 2배다.



복수를 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나라 국민소득이 그 나라 국민의 목숨 값이고, 자존심이다. 우리가 일본보다 잘 살면 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감히 저러겠나? 정권을 잡았으면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뭐, 민족정기 확립해서 체제전환 하겠다고?

1980년대까지 ‘유럽의 낙오자’로 꼽히던 아일랜드였다. 1922년 자유국으로 독립하고도 영국은 아일랜드를 ‘하얀 원숭이’라며, 자치능력이 없다며 멸시했다. 그랬던 나라가 1인당 소득으로 식민지 종주국 영국을 누른 것이 1998년, 독립한지 76년만이었다(영국 2만3500달러/아일랜드 2만5000달러). 상상해보시라. 우리나라가 경제로 일본을 누른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광복 76년인 2021년, 그때 우리가 일본을 앞설 수 있을까.


●브렉시트 앞두고…지는 런던, 뜨는 더블린

아일랜드는 기질과 역사에서 우리와 많이 닮았다. 격정적이고 가족한테 끔찍하다. 우리 민족은 가장 순수하고 뛰어난데 못된 이웃나라 때문에 수난의 역사를 겪고 분단까지 됐다고 믿는다. 학교에선 교사들이 “우리 조상 100만 명이 감자가 없어 굶어죽을 때 영국은 도와주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꼭 잉글랜드사람 닮았다”고 야단을 친다.

2008년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PIGS(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에 아일랜드의 ‘I’를 하나 더 넣어 PIIGS로 꼽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일랜드가 쫄딱 망했는지 알았다. 자료를 뒤져보니 2009년에도 1인당 소득 4만1000달러로 영국(3만4700달러)보다 잘 살았다. 게다가 놀라운 개혁조치로 3년 만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다 갚고는 영국과의 경제 격차를 더 벌려놓았다.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에선 미국 트럼프 뺨치는 포퓰리스트 총리가 나오네, 노 딜이 노 답이네 난리다. 아일랜드는 이참에 메릴린치, 바클레이즈, 뱅크오브어메리카 등 영국을 탈출하는 글로벌 금융사까지 ‘줍줍’했다며 희희낙락이다.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무모한 허영과 오만으로 비극에 빠졌는데 아일랜드는 브렉시트 여파로 왕관을 쓰나”라고 지난 2월 미국의 포브스지는 격찬을 했다.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영국 시민들. 런던=AP 뉴시스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영국 시민들. 런던=AP 뉴시스



●사회적 대타협, 더는 외치지 말라

유럽서 가장 가난한 이 나라가 식민지 종주국을 뛰어넘은 비결은 ‘사회적 대타협’이다. 국수주의와 보호주의, 공공부문이 고용의 3분의 1일만큼 꽉 막힌 나라였다. 이러다 진짜 망한다는 위기감에 1987년 노조는 임금인상 자제-기업은 재투자로 일자리 창출-정부는 감세와 사회보장을 약속하는 사회적 대타협에 성공했다(여기까진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리고 10년 만에 영국을 추월한 거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사회적 대타협을 깸으로써 위기극복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의 집권세력은 유럽 선진국처럼 사회적 대타협을 해야만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는 모양인데 글로벌 현실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2000년대 들어 국제화, 금융화가 진행되면서 고도성장기 핵심 요인이었던 사회적 파트너십은 이미 약화됐다…(중략) 2008년 위기가 발생하자 사회적 파트너십은 민간과 공공부문을 아우르는 협약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충남대 정세은 교수는 최근 논문 ‘위기 이후 아일랜드 모델의 변화와 지속성장을 위한 과제’에서 밝혔다.

경영자단체는 2009년 노조 요구를 못 맞추겠다며 사회연대협약 개정안을 철회하고 파트너십에서 이탈했다. 단체교섭은 민간 기업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노동개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공공부문 임금삭감, 인력감축으로 재정조정에 나섰다. 생산성과 경쟁력이 살아나면서 외국인투자와 수출이 급증했고, 마침내 켈틱 타이거는 켈틱 피닉스로 부활했다.




●힘없는 민족, 못난 나라로 살기 싫다

경제가 풀리면 감정도 누그러진다. 영국보다 잘 살게 됐다는 자부심에 영국인들에 대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미움도 거의 사라졌다. 요즘 아일랜드는 영국을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가장 가까운 경제협력 파트너로 본다.

자국 역사가 가장 비참하다며 ‘사악한 영국인’과 ‘고결한 아일랜드인’으로 구분하던 민족주의 역사관도 다양해졌다. 일자리와 부(富)가 ‘영광스러운 가난’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죽기 살기로 개방정책을 추진한 결과 경제성공이 가능했다고 박지향은 ‘슬픈 아일랜드’에 썼다.

출처 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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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경제로 일본을 뛰어넘으면 감정이 누그러질 수 있을까. 일본에 대한 분함과 억울함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외치고 또 외치는 일도 사라질까. 그랬으면 좋겠다. 민족주의 정부가 반일(反日)감정을 부추기고, 부국강병을 우습게 알며, 모두가 평등한 가난을 분배하지만 않는다면.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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