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국채보상운동의 1300만원은 지금 돈으로 1조원이 넘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대구 중구의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있는 모형. 1907년 국민들이 국채보상을 위해 의연금 모집에 나서는 모습이다(오른쪽). 작은 사진은 국채보상운동 당시 발행된 의연금 영수증. 1907년 4월 4일 강화군 하도면 주민들이 64원을 기탁했다는 내용이다. 영수증 아래쪽 ‘yang’은 양기탁의 영문 사인이다. 국채보상기념사업회 제공·동아일보DB
대구 중구의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있는 모형. 1907년 국민들이 국채보상을 위해 의연금 모집에 나서는 모습이다(오른쪽). 작은 사진은 국채보상운동 당시 발행된 의연금 영수증. 1907년 4월 4일 강화군 하도면 주민들이 64원을 기탁했다는 내용이다. 영수증 아래쪽 ‘yang’은 양기탁의 영문 사인이다. 국채보상기념사업회 제공·동아일보DB
국채보상운동은 나라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이었죠. 많은 여성이 참여하면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과도한 차관을 들여와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7년 대구에서 국민이 정부를 대신하여 외채를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중략) 그러나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해 이를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하고 탄압했다. 게다가 자연재해로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동아출판사·2016년)

교과서를 읽다 보면 여러 질문이 떠오릅니다. △대한제국은 어쩌다 빚 1300만 원을 지게 됐을까? △당시 1300만 원은 얼마나 큰돈일까? △모금된 돈은 어디에 사용됐을까? 오늘은 이러한 질문에 답해 보며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돌아보려 합니다.

○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에 의해 도입된 차관


대한제국의 어마어마한 국채는 일본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식민지화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채인 것입니다.

1902년 한일협약 체결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탁지부의 재정고문으로 임명됐습니다. 탁지부는 ‘탁지아문’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재무를 총괄하는 기구였습니다.

메가타는 1905년 1월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차관 300만 원을 들여와 대한제국이 기존에 사용하던 백동화를 일본제일은행권 화폐로 바꾼 것입니다. 6월에는 200만 원을 더 빌려와 행정기구 개편에 사용했고, 화폐정리사업에 따라 은행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자 150만 원을 추가 도입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산업과 수리토목공사에 사용한다며 500만 원을 더 빌려왔습니다. 그간 도입된 차관 1150만 원에 이자가 더해져 1300만 원의 국채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국채 1300만 원은 얼마나 많은 금액이었을까요. 보통 교과서에서는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다고 설명합니다. 현재 금액으로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1910년 일용직 노동자 임금 기준을 적용하면 어림잡아 계산이 가능합니다. 당시 1300만 원은 오늘 날 1조 원이 넘는 큰 금액으로 추산됩니다. 현재 노동자의 한 달 임금을 200만 원으로 어림잡고 65만 배를 곱하면 1조3000억 원에 달하기 때문이죠.

○ 전 국민 모금운동의 효시


초기에 모금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민족지도자뿐 아니라 인력거꾼, 기생, 백정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습니다. 금주와 금연으로 모은 돈을 내는 남성들도 있었습니다. 금연운동은 특히 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항하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내에서는 일본 담배가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은 각종 패물을 모금소로 보내는 여성들도 늘어났습니다. 서울에 설치된 국채보상기성회는 모금운동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신문에 게재하고, 의연금을 받는 장소도 지정했습니다. 각 신문사도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홍보했습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사 내에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라는 통합기관이 세워져 전국의 의연금을 관리했습니다.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모인 액수는 20만 원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 경무부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베델을 중국으로 추방했습니다. 총무 양기탁은 “보상금을 마음대로 소비했다”는 누명으로 구속됐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모았던 보상금은 대부분 일본에 귀속됐습니다. 1910년 전국 13도 대표로 구성된 국채보상금처리회는 보상금을 토지 매입과 민간대학 설립 등에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가 이를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1910년 말 국채보상금으로 관리되고 있던 약 15만 원은 총독부 재정에 편입됐습니다. 가난한 농민, 노동자, 부인들이 낸 국채보상금이 총독부 재정으로 사용됐다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역사적 가치

물론 국채보상운동의 결말은 허망하고 원통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기록물은 현재까지 2500여 점에 달합니다. 이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기록물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록물은 당시의 신문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한 ‘국채보상취지서’와 모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신문에 기록됐습니다. 신문에 남아있지 않지만 각 지역에 설립된 모금운동 단체들이 남긴 편지도 있습니다. 편지에는 모금단체가 자체적으로 작성한 기부자의 명단과 금액이 적혀 있습니다.

각 지역에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성산 이씨 홍와고택’에서 한국학진흥원에 기증한 50여 점의 문서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이 기록물에서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를 호소하는 편지글 △의연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과 물품, 금액 △국채보상운동 전국 본부에서 각 지역에 보낸 영수증 양식과 도장 규격 △모금운동이 중지된 이후 의연금을 학교 설립에 사용하기로 결정한 문서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3년 국채보상기념사업회는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국채보상관련 기록물은 2017년 10월 31일 기록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될 수 있었죠. 국권 상실의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제에 대항하려 했던 우리 국민의 애국심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국채보상운동#여성운동#모금운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