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내 노래가 사람을 울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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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2월 2일 14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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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의 휴먼 스페이스(6)

김제섭 씨와 박미선 씨가 발표한 1집 앨범.
김제섭 씨와 박미선 씨가 발표한 1집 앨범.


33년만의 귀향이다. 1980년대 초 대학가 노래운동을 이끌었던 쉰일곱 동갑내기 부부의 첫 독집 음반이 반갑다. 김제섭 씨와 박미선 씨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 1집을 녹음한 것이 1984년 겨울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가까스로 심의를 통과한 9곡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6월 민주항쟁 이후다.

부부가 만든 ‘모두나’ 첫 앨범은 소박함이 매력이다. ‘모두나’는 김씨와 박씨가 2004년 경기도 안양에 문 연 문화카페 이름이다. 2층 계단 입간판 글씨처럼 이곳은 ‘모두가 참된 나를 찾아가는 공간’을 지향한다. 격동의 1980년대를 지나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두 사람에게 이 땅의 시민들은 휴식이 절실해 보였다. 그런 이유로 카페 창문에 큰 글씨로 ‘쉴 수 있는 곳, 쉬어 가는 곳, 쉬고 싶은 곳’이라 써 붙였다.

문화카페 ‘모두나’에서 노래하는 두 사람.
문화카페 ‘모두나’에서 노래하는 두 사람.


‘모두나’ 1집의 첫 곡은 박미선 씨의 독창 ‘귀향’이다. 박씨는 노찾사 1집에서도 머릿곡 ‘갈 수 없는 고향’을 불렀다. 그때는 고향에 가지 못한 여공들의 슬픔을 잔잔하게 읊었다면, 지금은 가고 싶었던 고향에 마침내 돌아온 느낌으로 편안하게 속삭인다. 노랫말처럼 ‘온갖 어려움 이겨내고 돌아오는 나의 그리운 그대’가 정겹게 손짓한다.

김제섭 씨는 노찾사 1집에서 유일한 남성 독창곡 ‘산하’를 불렀다. 그가 1980년대에 만든 민중가요는 가사가 단단하다. 하지만 ‘모두나’ 1집에는 수시로 ‘사랑’이나 ‘그리움’이란 단어가 나온다. 카페를 찾아온 취객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울릴 때마다 곡을 썼기에 노랫말이 생생하다.

“어찌 보면 1집은 내 노래가 아니에요. ‘모두나’에서 놀다간 누군가의 사연이지요. 이곳에서 만난 인연으로 노래를 만들었으니, 이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어요.”

대중가요의 위대함

두 사람이 문화운동을 하던 시절 북한산 등반 모습. 앞줄 가운데가 박종철 열사 부친 박정기 씨.
두 사람이 문화운동을 하던 시절 북한산 등반 모습. 앞줄 가운데가 박종철 열사 부친 박정기 씨.


두 사람은 1979년 대학생이 되었다. 10‧26사건(1979년), 5‧18광주민주화운동(1980년)을 거치며 그들은 대학 노래패에 들어가 소위 ‘운동권’이 되었다. 노찾사를 만들고 노동자 공연을 기획하고 시민노래교실을 운영하며 10년 넘게 뛰어다녔다. 그 시절 대학가에 유통된 민중가요 테이프, 노래책, 유인물 등이 대부분 김씨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가수가 되고 싶었던 두 사람은 당시 자신의 음반을 발표하지 못했다. 싸움이 노래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직후 두 사람은 현장을 떠났다. 김씨가 심혈을 기울였던 공연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실패하자 두 사람은 곧바로 문화운동을 접었다. 일과 사람에 지친 나머지 소위 ‘잠수’를 탔던 것이다. 이후 김씨는 회사원으로, 박씨는 언어치료사로 살았다. 그들은 다시 노래할 일이 없으리라 여겼다. ‘모두나’를 오픈했을 때도, 가끔 지인들이 찾아와 옛 노래를 청할 때도 고사했다. 어쩌다 마지못해 부른 적이 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어색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 건 공연도 음반도 아닌 평범한 술자리 때문이다. 취객들이 진심을 담아 부르는 유행가가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날마다 사랑 타령”이라며 마냥 무시했던 대중음악이 귀에 친숙해지면서 두 사람은 술자리에 동석해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불렀다. 김씨가 작곡을 재개한 것도 그때다.

‘모두나’ 1집에서 가장 튀는 노래를 꼽자면 단연 ‘술 깬 다음 날’이다. 전자 오르간 반주는 노래방이나 가라오케를 떠올리게 하고 리듬은 트롯이다. 가사도 직장인들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고충을 직설적으로 풀어냈다. ‘오늘 이후에는 술 마실 때마다 몸도 조심 마음도 조심, 폭탄이 날으고(날고) 고기가 불에 타도 밝은 내일만 생각한다.’

김씨는 이 노래를 출퇴근만 3시간 넘게 걸리던 시절, 새벽까지 붙잡혀 술을 마셔야 했던 신입사원 시절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너무 힘들어서 쉬겠다고 했으나, 직장 상사는 무조건 나오라 다그쳤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출근하자, “신입사원이 한 번이라도 지각하면 당해년도 연차가 모두 말소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각 한 번으로 김씨는 연차 7일을 모두 잃고 휴가도 가지 못했다.

문화카페 주인으로 돌아온 김씨는 노래를 만들었으나 막상 부르지는 못했다. 그에 따르면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노래가 불현듯 떠오른 건 ‘모두나’에서 술 취한 사람들을 만난 뒤다. 과거엔 자신만의 상처였다면 지금은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B급 앨범의 간절함

故 신영복 선생이 1989년 김씨에게 써준 글씨.
故 신영복 선생이 1989년 김씨에게 써준 글씨.


두 사람이 다시 노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김씨의 대학 후배가 찾아온 적이 있다. 옛 노래와 새 노래를 섞어 음반을 내자는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중히 고사했다. “예전에 불렀던 노래들이 삶의 조건이 달라지니 더 이상 내 노래 같지 않았다”는 게 그들의 답변이었다. 두 사람은 긴 성찰의 시간을 보내면서 노래에 대한 감성도 달라졌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나’ 1집을 제작하면서 현재의 느낌을 충실히 따랐다. 예전의 그들이었다면 B급 디자인에 하류문화일 수도 있겠으나, 형식이나 시선에 구애받지 않았다. 자신들도 강남 나이트클럽 밴드에서 연주하는 뮤지션과 녹음하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트롯 연주에 익숙한 밤무대 기타리스트가 자신들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실감나지 않는다.

아무리 B급 앨범이라지만 가수는 긴장하기 마련이다. 33년 만에 녹음실로 들어간 박미선 씨는 호흡과 발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카페에서 그냥 부를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기술적 한계’였다. “완성도 면에서는 다소 떨어질 수 있겠으나 감정표현 만큼은 만족한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모두나’의 색깔이고 현실이다.

두 사람은 공연 장면 영상도 찍었다. 이 또한 아무런 테크닉 없이 일반 카메라를 세워놓고 촬영해 그대로 유튜브에 올렸다. ‘조금씩 조금씩’은 1집 음반의 대표곡이자 세상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낸 노래다. 통기타 선율에 사람의 내면을 파고드는 혼성 화음이 돋보인다. ‘다가오는 그리움, 익어가는 그 사랑’ 대목에서 두 사람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다.

김씨와 박씨는 그동안 ‘모두나’로 찾아와준 사람들과 1집 음반을 나눌 계획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새로운 노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희망한다. 자신들의 노래에 ‘필’을 받은 누군가와 함께 2집 앨범을 만들고 싶은 꿈도 내비쳤다.

문화카페 ‘모두나’ 벽면에 최근 액자가 걸렸다. 고 신영복 선생이 김씨에게 선물한 ‘길벗삼천리’다. 김씨와 박씨는 신영복 선생이 1988년 광복절에 출감한 직후부터 함께 등산을 다니면서 시화전을 기획한 인연이 있다. 선생의 글씨와 여러 정치인의 기증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그 수익금으로 지금의 서울 창신동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을 마련했다.

*문화카페 ‘모두나’(031-426-6583)

육성철 전직 기자
#모두나#김제섭#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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