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아정책 흑역사] ‘고자아파트’ ‘내시아파트’… 정관수술 전성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5일 0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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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정책 흑역사 <3>
● 아파트 청약 우선권
● 예비군 집중 공략, 잔여훈련 면제도
● 1984년 8만3527명 최고 기록

피임은 인류의 오랜 숙제다. 기원전 기록에 등장할 정도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1850년 이집트 파라오 아메네마트(Amenemhat) 3세 때 작성된 파피루스다. 남녀가 성교 후 아교나 꿀, 악어 배설물과 같은 물질을 이용해 여성의 체내에 넣어 임신을 막으려 했다는 내용이 적혔다. 가축의 방광 같은 내장을 원시적 형태의 콘돔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나 효과적이었을지는 미지수지만.
세계 최초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 10’
세계 최초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 10’

이처럼 오랜 피임의 역사 속에 이른바 ‘성의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먹는(경구용) 피임약이다. 생화학자 그레고리 핀커스가 개발한 최초의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 10’은 1960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판매 승인을 받았다. 이 약의 등장으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임신이 두려워 성관계를 기피하지 않아도 됐다. 핀커스는 여성이 임신 중에는 다시 임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여성의 몸은 임신 중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급격히 많아진다. 먹는 피임약은 바로 임신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호르몬 수치를 높여주는 성분으로 만든 것. 초기에 판매된 약은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부작용 논란을 일으켰다. 피임약 한 알에 무려 150ug의 합성 에스트로겐이 들어 있어 피임 효과는 컸지만, 고혈압, 부종, 혈전 등이 나타날 위험도 그만큼 높았다. 한때는 암이나 비만을 유발한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먹는 피임약은 발전을 거듭해 최근에는 용량을 20%대로 낮춰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암’ 유발 논란에 거부감



먹는 피임약이 국내에 보급된 것은 1960년대 후반. 정부의 가족계획 차원에서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시판 초기라 부작용이 생각보다 심했다. 더욱이 당시 보수적인 사회 정서상 피임약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약을 먹으면서까지 성생활을 즐기는 여성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임을 하려면 약을 매일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는 것도 귀찮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한번에 한 달분을 복용하면 안 되느냐는 문의가 많았고, 어떤 여성은 실제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약을 먹고 하혈이 생겨 놀라 병원으로 달려온 적도 있다. 당시엔 피임약을 복용법대로 먹기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먹는 여성이 더 많았다고 보면 된다. 먹는 피임약이 암 논란에 휩싸인 것도 비슷한 시기다. 1968년 미국 뉴욕 주 국회의원에 출마한 한 후보자가 먹는 피임약이 암을 유발하는데 한국에 대량 보급됐다고 주장한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것. 이 소식은 먹는 피임약에 대한 한국 여성의 거부감을 더욱 강화시켰다.

정관 수술 받으면 정력이 뚝?


정부는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독려했다. 수술비용이 크게 들지 않으면서 영구적으로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관리가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혔다. 정부는 정관수술 건수를 늘리려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수술을 받은 남성에게 회복기간 중 근로보상금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수술부작용을 최소화하려 ‘피임시술 사후관리위원회’까지 만드는 등 갖가지 유인정책을 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성이 정관수술을 기피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성 상식 때문이었다. 정관수술을 받으면 ‘정액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정력이 떨어진다’는 등 성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여긴 것. 이런저런 핑계로 몸에 칼을 대기 싫은 남편 대신 아내가 영구피임수술인 난관절제수술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남편의 성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수술을 받는 게 낫겠다는 비상식적 판단에서였다.
정부가 불임시술(정관수술)을 받은 남성에게 아파트 입주 우선권을 제공한 이후 ‘불임시술 바람’이 불고 있다는 1977년 9월 8일자 신문 기사.
정부가 불임시술(정관수술)을 받은 남성에게 아파트 입주 우선권을 제공한 이후 ‘불임시술 바람’이 불고 있다는 1977년 9월 8일자 신문 기사.

1974년 정부가 인구 억제정책 중 하나로 예비군 훈련기간에 정관수술을 받도록 한 이후 수술 건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예비군 제도는 북한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무장공비 31명을 극비리에 남파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국 정찰함 프에블로호를 납치하는 등 지속적으로 대남 군사도발을 시도했다. 박정희 정권은 대북 군사적 약세를 극복하고자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복무기간은 전역 시기와 관계없이 35세까지로 정했다가 1989년부터 33세까지로 단축했다. 예비군 중에는 기혼자가 많았다. 연령대를 보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시기와 맞물렸다. 이들을 가족계획사업에 동참시킨 것은 절묘한 아이디어였다.

‘고자아파트’ ‘내시아파트’

1977년 반포아파트 분양 신청 당시 몰려든 시민들. 입주 우선권을 받은 불임시술자가 많았다.
1977년 반포아파트 분양 신청 당시 몰려든 시민들. 입주 우선권을 받은 불임시술자가 많았다.

정부는 예비군들에게 다양한 ‘당근’을 제시했다. 1977년 12월에는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에게 주공아파트 및 주택부금아파트 분양 우선권을 부여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1982년에는 국방부훈령으로 예비군훈련 중 정관수술을 한 사람에게 훈련 잔여시간을 면제해줬다. 기혼자는 예비군 잔여훈련 면제 혜택과 더불어 수술비 면제, 아파트분양 우선 혜택 등 경제적 이득까지 챙길 수 있었다. 당시 내 집 마련 열기와 더불어 청약 우선권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덕분에 수술 건수도 두 배 이상 늘었다. 분양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서울 강남의 모 아파트의 경우 정관수술자가 청약우선권을 갖게 되면서 ‘고자아파트’ ‘내시아파트’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에 힘입어 정관수술 참여자는 1984년 최고치를 찍었는데, 이 한 해에만 8만3527명의 남성이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 참여자 분포를 보면 자녀 1~2명을 둔 30대가 가장 많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느덧 60대가 됐다. 얼마 전 비슷한 또래의 한 남성이 진료실을 찾았다. 전립선비대증 초기 환자였다. 아직 수술할 단계는 아니고 약물치료로 가능하다고 하자, 혹시 젊었을 때 정관수술을 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갑자기 지갑을 꺼내더니 오랫동안 보관해 온 듯 꼬깃꼬깃하고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보여줬다. 정관수술 증명서였다. 30대 때 아파트 청약우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쪽지였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아파트 청약을 하지 못해 기념으로 갖고 다닌다고 했다. 종족번식 기능을 아파트 청약우선권과 맞바꾼 것에 대한 미련과 불안 때문일까. 어찌됐든 정관수술은 전립성비대증과는 무관하다.
이윤수 한국성과학연구소장
#산아정책 흑역사#magazine d#정관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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