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재기자의 티비夜話] SBS ‘강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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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일 16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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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친화적 토크쇼? 혹은 떡밥의 왕국

훗날 언론학자들은 2004년 7월을 중요하게 기록할지 모른다.

KT의 인터넷 포털 '파란닷컴(www.paran.com)'이 공식 출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큰 존재감 없는 파란닷컴의 출범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파란닷컴은 '스포츠 연예 컨텐츠'에 대한 누리꾼들의 높은 관심에 주목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당시 국내 5대 스포츠 신문 컨텐츠를 회사당 월 1억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1년간 독점계약을 체결해 버린다.

일명 '파란 사태'의 배경에는 급성장하던 포털 시장이 존재한다.

집단 게스트 토크쇼로 화요일 시청률 1위를 차지한 SBS 강심장. SBS 제공
집단 게스트 토크쇼로 화요일 시청률 1위를 차지한 SBS 강심장. SBS 제공


당시 포털사들은 젊은 누리꾼이 선호하는 스포츠와 연예 기사를 첫 화면에 집중 배치해 치열한 방문자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후발 주자인 파란이 1년간 60억원(5개사x12억)에 스포츠신문 컨텐츠를 싹쓸이 한 것. '킬러컨텐츠의 독점 보유만으로 포털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이 작용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네이버와 다음 야후 등 경쟁 포털들은 유사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인터넷 언론사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결국 단 1년 만에 스포츠신문들은 신문판매 급감은 물론 온라인 여론 주도권까지도 상당부분 잃어야 했다. 엔터테인먼트 컨텐츠에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파란사태'는 달라진 미디어 환경을 상징하는 역사로 남았다.

포털 친화적 방송의 표본 '강심장'

매일 아침 포털 메인화면과 실시간 검색어는 전날 밤 토크쇼에 출연한 연예인들의 가십거리로 채워지는게 최근의 트렌드다. 방송이 뜨려면 '포털 친화적'이어야 한다. 가십의 양이 많고 강도가 높을수록 이는 다시 시청률로 유입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 어느 국가 방송이든 심야 시간대는 슈퍼스타들이 등장하는 토크쇼로 채워진다.

제이 레노의 '투나잇 쇼'나 레터맨의 '레터맨 쇼' 등 미국스타일 정통 토크쇼의 특징이라면 MC와 게스트와의 1대1 대화다. 편집이 돼서 대화시간이 짧아질 지라도 '사람과 사람'이라는 대화의 기본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토크쇼도 이 스타일을 따르는 강호동의 '무릎팍 도사'이다. 이보다 더 대중적이고 초대 손님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살리는 '쇼'는 없다. 그러나 출연자가 단 1명이라서 그의 무게감에 따라 이슈 창출력의 편차가 크다는 약점도 있다.

그와 대척되는 지점에 화요일밤 방송되는 SBS 야심작 '강심장'이 자리한다. 강심장은 얼마나 많은 가십거리(양)를 단시간 내(속도)에 창출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다. 12월 1일 불과 7회를 맞이한 이 프로는 지극히 한국적인 포털 주도형 미디어 구조를 반영한 토크쇼 형식의 완성판이다.

이제 토크쇼의 미덕은 '양'과 '속도'

우선 압도적인 게스트 수에 주목해야 한다.

'강심장'의 전작인 '야심만만'이나 현재 경쟁작인 KBS '상상플러스'를 포함해 대다수 토크쇼의 게스트 숫자는 4~6명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집단 토크라고 해도 MC숫자(2~4명)를 고려하면 그 정도가 대화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 토크쇼 대부분은 출연자가 MC를 포함해 10명 내외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강심장'은 MC 2명에 게스트 20명 이상이라는 파격적인 형식을 들고 나왔다.

강심장의 두 MC 강호동과 이승기 그러나 실제 MC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다. SBS 제공
강심장의 두 MC 강호동과 이승기 그러나 실제 MC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다. SBS 제공


물론 20여명 전부가 대화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때문에 과감히 대화의 형식을 포기하고 출연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강력한 논란거리(인터넷 속어로 떡밥)'를 요약해 시청자들에게 던진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시청자와의 대화'라는 진화인 셈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옐로 저널리즘'으로의 퇴행이다.

물론 누리꾼이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TV토크쇼를 진정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인터넷 기반의 연예 전문 매체들이다.

'저비용 고효율'의 인터넷 기반 속보 중심 매체의 장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TV토크쇼를 전파할 때다. TV 입장으로도 너무나 반가운 우군이다. TV를 보지 않아도 본 것 같은 기시감을 줄 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의 단순 가십성 발언에도 '공식'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요일 아침 포털 연예뉴스는 온통 '강심장'과 경쟁자인 '상상플러스' 게스트들이 쏟아 놓은 가십거리로 채워진다.

기존 토크쇼의 한계란 1시간 방송 분량에 주목할 얘깃거리가 2~3개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나 '강심장'의 경우는 잘 요약된 재미있는 얘기가 10여개 이상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언론사들마다 뉴스가 중복될 우려도 없고, 더 많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10년 전 선배 프로인 '서세원 토크쇼'를 따라 '서바이벌 토크쇼'라고 분류되는 강심장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포털 환경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진화(?)한 토크쇼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방송 도중 슈퍼주니어의 이특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라는 가상의 순위를 공개하는 것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화면 아래는 한 포털사의 검색창이 광고로 뜨기도 한다.

'강심장'의 활약 덕분에 한동안 공영성을 부르짖던 KBS 상상플러스마저도 이제는 다수의 연예인을 부르기 시작했고, '자극적 소재'를 질질 끌지 않고 빠르게 돌리고 있다.

바야흐로 토크쇼 '떡밥'의 속도와 양이 시청률을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결정적 장면

강심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가수 황혜영. SBS 제공
강심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가수 황혜영. SBS 제공
12월1일(화) 방송분. 90년대 초반의 인기가수 황혜영(36)이 오랜만에 토크쇼에 등장했다. 그는 '20세기 연애'라는 주제로 얘기를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 가수가 나에게 대쉬를 했다, 나도 그에게 마음이 있어 몰래 데이트를 시작했다, 차에서 밀회하던 중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접촉사고가 났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양쪽 기획사에서 삐삐를 빼앗고 24시간 밀착감시를 시작했다, 결국 그와 아쉽게 헤어졌다…'

즉각 MC들은 "그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쏟아낸다. 시청률의 핵심 포인트는 당장 답을 얘기하지 않는 것. 황혜영은 '94년 최고의 인기그룹 중 한 분, 아직은 미혼'이라고 얼버무렸다. 이에 강호동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NSI(네티즌 수사대)가 있습니다"하고 결론 내린다.

강호동의 예상대로 12월2일 아침 포털검색어 1위는 '황혜영' 그리고 스캔들의 의심자로 지목받은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R.E.F'가 상위권에 올랐다. 이 스캔들과 관련된 수많은 연예기사들이 탄생한 것 또한 모두가 예견한 일이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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