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캐릭터열전]비트의 '정우성'

  • 입력 2001년 12월 10일 18시 41분


서울 강북의 신촌은 내게 있어서 정신의 고향이다. 껄렁했던 고교시절부터 중구난방의 대학시절을 거쳐 글을 써서 밥을 먹게된 이즈음에 이르기까지 나는 언제나 신촌 주변을 맴돌아 왔다.

이제 나는 내 고향의 ‘물을 흐리는’ 존재일 뿐이다. 신촌의 밤거리를 집 나온 소년들과 술 취한 소녀들이 접수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말썽많다던 수능시험이 끝난 직후여서 더욱 그런가. 요즈음 신촌의 뒷골목은 떼지어 거리를 휩쓰는 10대들이 게워낸 토사물들로 질펀하다. 이따금 화장이 안 어울릴만큼 앳된 얼굴을 한 소녀들을 옆에 끼고 한심한 패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그들과 마주칠 때면 미소가 머금어지면서도 가슴이 짠하다. 그들 역시 20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힘겨운 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미성년의 세계는 벗어났으나 성년의 세계에는 진입하고 싶지 않은 시기의 한복판에 ‘민’(정우성)이 있다. 대학사회든 깡패사회든 마찬가지다. 그는 기성사회의 그 어떤 부문에도 편입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그는 나직하게 읊조린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열아홉살이 되었지만 내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깡패조차 되기 싫었던 그에게 남달리 눈부신 싸움솜씨란 그저 떼어버리고 싶은 꼬리표였을 따름이다.

‘키 컨셉 신’(key concept scene)이라는 것이 있다. 캐릭터를 잘 드러내면서 영화가 표현하고자하는 바의 핵심을 비주얼(visual)하게 담아낸 신이다. 나는 영화 ‘비트’를 쓰면서 두 개의 키 컨셉 신을 만들었다. 하나는 오토바이를 탄 채 눈을 감고 두 손을 놓아버리는 신이다. 민의 뒷편으로 가로등과 터널이 멀어져갈 때 그 슬픔의 속도가 잘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노을지는 산동네 놀이터의 정글짐 위에 앉아 있는 신이다. 민은 이미 정글짐에서 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다. 놀이터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정글짐은 그래서 하나의 철창처럼 보인다. 홀로 그 위에 넋 놓고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민의 실루엣이 쓸쓸하고도 위태롭다. 신촌의 밤거리에서 민을 생각한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오토바이를 멈추고 그를 정글짐에서 불러내려 술 한잔 따라주고 싶다.

<시나리오작가> besmart@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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