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줌인]이제는 '영자'를 내버려 둬라

  • 입력 2001년 2월 21일 18시 27분


아버지와 단둘이 TV도 없는 산골에 묻혀 살던 소녀. 어느날 들이 닥친 ‘TV 카메라’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하루 아침에 ‘팬’과 ‘후원회’가 생기고, 첫 서울나들이를 한 부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또다시 속편 다큐로 제작된다. 마침내 ‘상업주의의 꽃’이라는 CF까지 찍는다.

지난해 KBS <인간극장>을 통해 유명해진 ‘산골소녀’ 영자(19) 이야기다. 속편 다큐에 이어 ‘3탄’에 대한 제작 논의가 오갈 즈음 들려온 ‘삶의 속편’은 추하다 못해 슬프다.

‘문명세계’에서 공부하고픈 생각에 영자는 아버지와 갈등을 남긴 채 도시로 와 후원회장 집에서 산다. 몇 달후 홀로 집에 남아있던 아버지는 숨진 채 발견된다. 경찰은 영자의 CF 출연료 7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영자의 ‘보호자’를 자청해 온 후원회장을 구속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진 뒤 ‘인간극장’ 인터넷 게시판에는 항의가 쏟아졌다.

“방송이 사람을 죽였다.”

“시청률에 급급한 방송 때문에 영자는 아버지도 잃고 돈도 뺐겼다.”

담당 PD는 “요즘은 18년간 해 온 방송에 대해 회의마저 든다”고 했다. 또 다른 PD는 “미래까지 예측하고 책임져야 한다면 도대체 방송에서 무엇을 다룰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다. 영자는 ‘미디어의 영향과 책임’이라는 논란의 ‘살아있는 교재’가 된 셈이다.

그러나, 만약 잘못이 있다면, 과연 방송만일까. 영자 이야기가 처음 방영된 후 시청자들은 ‘보석같은 프로그램’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방송위원회와 시민단체는 이 프로를 ‘좋은 프로그램’으로 뽑아 상을 줬다. 방송이 ‘범인’이라면 “속편을 제작해 달라”고 요구했던 시청자나 영자의 ‘상품성’을 이용하려했던 사람들 또한 ‘공범’이 아닐까.

현재 삼척 경찰서의 보호를 받고 있는 영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까운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하지만 대중들의 ‘무관심’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MBC는 20일 ‘생방송 화제 집중’에서 영자 아버지의 장례 모습과 친인척 인터뷰, 수사진행 상황 등을 자세히 다뤘다. 영자를 위해서 대중들은 애정이든, 관심이든, 호기심이든, 그에게 쏠린 눈길을 거두어야 한다.

제발, 한동안 영자를 방송에서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강수진 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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