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전문기자의 청계단상]화성에서 온 정치, 금성에서 온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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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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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전문기자
김상철 전문기자
때 묻은 책을 책장을 뒤져 다시 집어 들었다. 10여 년 전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갱년기를 앞둔 아내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샀던 책이다. 필자는 어머니를 빼면 남자만 있는 집에서 자랐다. 그래서 필자 외에는 모두 여자인 우리 집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들만 있는 집보다 낫다는 죽마고우의 말이 위로가 됐지만 사춘기 딸의 거침없는 반항적 언행을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춘기 딸이 아내와 얘기하다 무엇이 맘에 안 드는지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 잠그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냉전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관계가 늘 좋을 수만은 없다. 갈등이 있을 때 가장으로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가정 분위기는 물론이고 관계 회복의 시점도 달라진다. 사춘기 때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면 아버지는 따로 불러 “사내자식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라”며 등을 한번 두드려 줬다. 조언대로 어머니에게 쿨하게 사과하면 냉기가 수그러들고 집에 온기가 돌았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해도 모녀간에 얽힌 매듭이 안 풀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내와 딸이 냉전에 돌입하면 가장이 나서서 중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여자의 본질적 속성을 모르니 중간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별로 효과가 없어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두 당사자가 “그게 문제라고 생각 안 하느냐”며 편을 가르듯 몰아붙일 때는 더 힘들었다. 딸은 마지못해 사과를 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토를 달았다가 그게 빌미가 돼 냉전이 길어지기도 했다.

여자의 심리와 말, 행동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어 답답하던 그때 눈에 들어와 구입한 책이 스테디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였다. 결론적으로 남녀의 차이와 여자의 특성을 아는 데 도움이 됐다. 역으로 딸들에게는 남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 한번 읽어 보라고 권했다.

이 책에 나오는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는 첫눈에 반해 지구에 정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을 겪는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화성 남자는 목표 지향적이고 금성 여자는 관계 지향적인 게 가장 다른 점이다. 남자는 관계를 희생하더라도 목표를 추구하지만 여자는 목표보다 주위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또 고민이 있을 때 남자는 동굴에 들어가 침묵하지만 여자는 우물가에서 수다로 푸는 것도 차이점이다.

정치는 목표 지향적인 화성 남자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 일자리 창출 등의 목표를 내걸고 이전 정부와 차별화 행보를 하고 있다. 경제는 관계 지향적인 금성 여자에 가깝다. 새 정부가 출범하거나 새 정책을 마련하면 재계는 거래처를 만들 때처럼 대화하며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새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추가경정예산 편성안을 발표했지만 재계는 공식 코멘트를 내놓지 않았다. 경제5단체는 그동안 정부가 주요 정책을 발표하면 방향이나 실행 방안에 대한 논평을 해왔으나 이번에는 일제히 입을 꼭 다물었다. 재계가 잔뜩 움츠린 것은 앞서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이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내놨다가 청와대와 여당의 집중포화를 받은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베이비부머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로서 일자리로 고민하는 딸들을 보면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최우선 정책 방향에 공감이 간다. 첫 직무수행 평가에서 지지율 84%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치를 기록한 이유의 하나로 생각된다. 그 연장선에서 요건 논란이 있지만 추경이 국회 논의를 거쳐 청년 취업난의 숨통을 틔우는 마중물 역할을 하면 좋겠다. 다만 소통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새 정부가 다른 의견을 냈다고 경제단체를 압박하는 모양새는 썩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경총 부회장의 발언은 회원사 친교 모임에서 나왔고 평소 밝혀 왔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기에 더 그렇다. 대통령이 일자리 현황판을 집무실에 설치한 다음 날 그런 발언이 나와 괘씸했겠지만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견 제시는 의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금성 여자가 수다를 떠는 건 해결책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달라는 의미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행복을 찾아가는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정치와 경제가 오해를 풀고 대화하면서 저성장의 탈출구를 함께 찾길 바란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
#가족 관계#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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