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장선희]인증샷이 뭐길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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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희 문화부 기자
장선희 문화부 기자
최근 열린 제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상보다 ‘역대급 피날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봉투 배달사고가 나면서 하이라이트인 작품상 수상작이 번복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해외 토픽’ 수준의 화제를 모은 뒤 곧 잊혀졌지만 현지에선 파장이 꽤 길게 갔다. 미국의 주요 매체들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왜 회계사가 봉투를 전달했는지’ ‘미국 문화 관련 단체들이 회계비용으로 연간 얼마를 지출하는지’ 등의 기사를 쏟아냈다.

문제는 ‘인증샷’이었다. 봉투를 잘못 전달한 회계사는 무대 뒤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에마 스톤을 찍은 ‘인증샷’을 트위터에 올리느라 바빴다. 그의 인증샷은 해프닝 이후 누리꾼들에 의해 캡처 된 뒤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일보다 인증이 그렇게 중요했느냐’는 비난과 조롱도 쇄도했다. 너도나도 일상 속 ‘인증하기’를 즐기는 요즘, ‘그게 나였다면…’ 싶어 오싹해지는 대목이다.


인증샷은 공포영화의 소재로까지 등장했다. 2월 개봉한 ‘언프렌드’에선 어둠의 기운을 풍기는 외톨이 여대생 마리나와 쉴 새 없이 친구 신청이 밀려드는 ‘SNS 인기녀’ 로라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마리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친구 신청을 무심코 수락한 뒤 광적인 집착에 시달리던 로라는 생일파티를 앞두고 ‘가족과 보낼 것’이란 거짓말로 마리나를 초대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면 좋았으련만. 로라는 습관대로 친구들과 찍은 생일파티 인증샷을 SNS에 남기고 만다. 상처받은 마리나는 이후 잔혹한 저주 퍼레이드를 펼친다. 인증샷이 여러 사람을 잡는다.

인터넷엔 기상천외한 ‘인증샷’이 넘쳐난다. 지난달엔 국내 대학병원에서 실습하던 의대생들이 기증받은 해부용 시신 앞에서 찍은 인증샷을 SNS에 올렸다가 물의를 빚었다. 과태료 50만 원씩을 부과하는 선에서 사건은 정리됐지만, 인증샷에 경악한 사람들이 장기 기증 서약을 줄줄이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뿐인가. 지인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식사로 나온 육개장 사진을 찍은 뒤 ‘먹스타그램’ 등의 해시태그를 단 인증샷을 올리거나, 철로 위처럼 위험한 장소에서 자랑하듯 찍은 인증샷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증 문화는 이미 일상 깊숙이 들어왔다.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데서 인정 욕구가 충족되는 이들을 가리켜 ‘ㅇㅈ(인증·인정)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나왔을 정도다. 한 대학생은 “현실에선 금수저도 아닌 데다 취업도 안 되고 변변히 자랑할 게 없으니 SNS에서 음식 같은 다양한 인증 사진을 올려 대리만족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 지난해 한 20대 전문 연구기관이 20대 남녀 410명을 대상으로 벌인 인증샷 문화 관련 실태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77.1%)이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남을 인정해주는 데 인색하다’(45.9%)고 답하기도 했다. 여간해선 인정받는 지위까지 오르기 쉽지 않은 사회, 인정에 인색한 우리 사회가 인증 광풍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초대형 실수를 저지른 회계사는 어떻게 됐을까. 불행 중 다행히도 직장에서 해고까지는 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아카데미 위원회 측은 “그들(실수에 연루된 회계업체 두 명의 직원)을 다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부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시상식의 회계업무를 해당 업체가 계속 맡을 수 있을지도 검토 중이라고도 했다. 인증샷 한 장의 대가치곤 참 가혹하다. 그날, 문제의 회계사가 남들의 ‘좋아요’에 신경 쓰지 않고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에마 스톤을 그저 자신의 눈에만 담았더라면 어땠을까. 모두에게 행복한 시상식이 됐을 텐데 말이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
#엠마스톤#인증샷#제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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