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2004과학기술인]<7>서울대 화학부 백명현 교수

  • 입력 2004년 5월 23일 17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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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명현 교수는 컴퓨터는 물론 영어와 가야금의 고수인 78세의 어머니로부터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백명현 교수는 컴퓨터는 물론 영어와 가야금의 고수인 78세의 어머니로부터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80세에 가까운 어머니께서 컴퓨터로 영상시와 e메일을 보내주세요. 힘들고 지칠 때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나지요.”

서울대 화학부 백명현 교수(56)의 어머니 양민용 여사(78)는 전형적인 ‘아침형 어머니’다. 오전 4시면 일어나서 영어와 컴퓨터 공부를 하신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지식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철학이 백 교수를 세계적인 화학자로 만들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어머니는 정서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저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셨어요. 어머니는 가야금을 뜯고 저는 바이올린을 켰죠. 정규과목뿐 아니라 미술, 체육, 무용 등 예체능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신동’과 ‘천재’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던 백 교수는 당시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경기여중에 합격하면서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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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한양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아버지에게 수학과 과학에 대한 소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뭔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화학으로 전공을 정한 백 교수는 실제로 그런 물질을 만들고 있다. 이온교환수지, 다공성화합물, 초분자다공성화합물 등 이름은 생소하지만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질이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초분자 디자이너다. 초분자를 만들기 전에 특정 기능성을 갖도록 미리 디자인한 다음, 레고 블록을 만들 듯이 원하는 초분자를 조립한다.

초분자는 분자가 2개 이상 모여 있는 거대분자다. 쉽게 말해 레고 블록 조각 하나하나는 일반분자이고, 레고 블록을 조립한 형태는 초분자다. 초분자화학은 원하는 기능과 모양을 마음대로 조립할 수 있기 때문에 최첨단 화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고체에 압력 등 자극을 가하면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런데 백 교수가 세계 최초로 만든 신물질은 자극에 대해 생물처럼 움찔거리며 반응을 한다. 또 반도체칩의 기능을 분자 크기에서 실현시키는 기억소자, 수소 기체를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용기의 재료 등도 만들어냈다.

이런 연구결과들의 활용범위는 무궁무진하다. 현재보다 수만 배 처리능력이 뛰어난 슈퍼컴퓨터를 만들고 환경친화형 수소자동차에 장착될 연료통을 개발하는 데 밑거름이 된다. 창의력이 요구되는 이 연구에 어렸을 때부터 길러온 예체능의 소양이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언제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생고생해서 완성한 최신 연구논문을 외국 학자들이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속상하지만 더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연구하는 동안, 다른 학자들에 의해 관련 논문이 나오면서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한 분야에 대해 업적을 인정받게 되면 미련 없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길 좋아한다. 그에게 시련은 늘 새로운 변화의 계기였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연구는 한참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것은 언제나 흥분을 가져다주지요.”

요즘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 몰두해 있다. 초분자와 나노(원자)물질을 접목해 두 가지 성질을 가진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세계 최초로 초분자에 실버나노입자가 들어 있는 물질을 만들기도 했다. 이 결과가 물질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만들지 못한 신물질이 나올 가능성은 크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이라고 얘기하는 백 교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야.”

지금도 틈틈이 떠올리는 ‘어린왕자’의 이 구절은 백 교수를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으로 떠나게 하는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이 어린왕자처럼 순수하고 맑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이억주 동아사이언스기자 yeokju@donga.com

▼백명현 교수는▼

1948년 전북 전주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경기여중과 경기여고를 졸업했고 바이올린 등 음악실력이 수준급이어서 고등학교 때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정도였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기인 서정헌 교수(서울대 화학부)와 결혼하면서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74년과 1976년 시카고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1977년부터 서울대 화학교육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0년부터는 서울대 화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7년 전세계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과학 학술지인 ‘Coordination Chemistry Review’s의 편집위원으로 선정됐다. 또 2001년 초분자화학 분야의 국제적인 연구성과로 제1회 여성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다.

▼청소년에게 한마디▼

힘 안 들이고 즐기면서 살려고 하는 것보다는 힘들더라도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가치와 행복이 뭔지 끊임없이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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