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715>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3월 1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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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졌다. 지고 말았다. 내가, 이 항적(項籍)이, 천하의 패왕이 정말로 싸움에 졌다….’

군막 안에서 보검에 남은 악전고투의 흔적을 지우며 패왕은 줄곧 그렇게 중얼거렸다. 30만 한군 사이를 피투성이 싸움으로 빠져나올 때만 해도 실감되던 패배가 다시 애매하고 추상적이 되어 갔다. 아니,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패왕의 중얼거림은 어쩌면 패배의 실감을 되살리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겹겹으로 에워싼 적진을 돌파하면서 갑주 걸친 장수만도 수십 명을 베어 넘겼건만 칼날은 전설의 보검답게 별로 상한 곳이 없었다. 오히려 격전의 흔적은 튀긴 피가 끈적하게 말라붙은 칼자루나 칼집에서 더 뚜렷했다. 패왕의 갑옷과 투구도 피를 뒤집어쓴 듯 검붉게 얼룩져 있었다. 군막 앞에 안장을 얹은 채 묶여 있는 오추마(烏추馬)도 피를 뒤집어쓴 듯하기는 패왕과 마찬가지였다.

그때 멀리서 군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며 방벽 안 진채가 술렁거렸다. 진채를 에워싸고 있던 한군이 드디어 공격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좋다. 다시 한번 싸워 보자. 정말로 너희들이 나를 이길 수 있는지.’

패왕이 지그시 이를 사려 물며 보검을 칼집에 꽂고 군막을 나왔다. 오추마에 뛰어올라 새 철극을 뽑아들고 소란스러운 곳을 바라보니 서북쪽으로 뉘엿한 겨울 해를 등지고 방금 한 떼의 인마가 다가와 진세를 펼치는 중이었다. 사면팔방 중에서 패왕의 진채가 등지고 있는 동남쪽 산등성이를 빼고 유일하게 비어 있던 곳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각자 맡은 방벽과 보루만 잘 지켜내면 적은 한 발짝도 우리 진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패왕은 그런 말로 남은 장졸들을 격려하며 한참이나 한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종리매와 계포의 군사들이 패왕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팽월이 철저하게 차단하는 바람에 진채 안에는 패왕을 따라 한군을 뚫고 나온 군사 7천이 전부였으나, 넓지 않은 곳에 몰려 있어 그런지 방벽과 보루 사이를 메운 전열(戰列)이 제법 두꺼웠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한군이었다. 30만 대군을 모두 그리로 모아들인 듯 겹겹이 초나라 진채를 에워싸고도 해가 질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저것들이 야습을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방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패왕이 그런 명을 내리고 자신도 갑옷투구를 걸친 채로 군막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한군은 그 밤도 조용하기만 했다. 초군의 진채를 에워싼 한군의 화톳불만 겨울 밤하늘을 훤하게 비출 뿐, 새벽까지 화살 한 대 날리지 않았다.

그럭저럭 날이 밝았다. 갑옷투구를 걸친 채 밤을 보낸 패왕이 새벽같이 군막을 나와 방벽과 보루를 돌아보는데 강동에서부터 따라온 젊은 사인(舍人) 하나가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대왕께 아룁니다. 밤새 진채를 빠져나간 군사가 적지 않은 듯합니다.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 말에 놀란 패왕이 사람을 시켜 헤어보니 달아난 군사만도 3천이 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패왕은 그게 바로 한군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일임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무엇 때문인지 한군은 북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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