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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 청년들 낮엔 일하고 밤엔 훈련받으며 독립의 꿈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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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 청년들 낮엔 일하고 밤엔 훈련받으며 독립의 꿈 키워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성동기 기자 입력 2020-01-11 03:00수정 2020-01-11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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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8화> 미국 下
박용만은 1914년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며 독립군 양성을 본격화했다(왼쪽 사진). 미주 한인 최대 군사단체였던 대조선국민군단은 하와이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며 위용을 과시했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미일전쟁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일대 기회로다. 미일전쟁이 되면 일본의 세력이 한국과 만주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일본이) 전제정치를 쓰는 러시아는 이겼으나 8000만 인구가 다 병정인 미국을 어찌 당하리오.’

미국 한인단체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는 1907년 9월 6일자 사설에서 미일전쟁은 한국이 독립할 기회라고 강조했다. 1907년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정미의병이 일어난 때이다. 풍전등화 같던 조국의 처지를 걱정하던 재미 한인들은 사실상 대한제국이 사라지게 됐다는 생각으로 미일전쟁설을 거론하며 독립전쟁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일전쟁설은 한인들만의 바람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으면서 미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상당히 격화된 상태였다. 1905년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일본인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선 일본인 학생 입학 금지를 포함한 반일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미국 내 일본인들이 미국의 항구와 포대 위치를 정탐해 지도를 작성하다가 발각됐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한다는 미일전쟁설은 바다 건너 유럽에서도 나돌 정도였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한반도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재미 한인들은 주로 대미 외교와 개인의 실력 양성에 집중했다. 하지만 박용만(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비롯한 무장투쟁론자들은 미국 땅에서 군 지휘관들을 육성해 앞으로 만주나 연해주 등에서 펼쳐질 독립전쟁에 기여하기를 기대했다. 이들은 미일전쟁이 터지면 일본이 패배하고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군사학교 설립에 공을 쏟았다. 미 본토와 하와이에 거주하던 500여 명의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여기에 힘을 보탰다. 조국 광복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한 한인 청년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고단한 생활을 기껍게 여겼다.


○ 네브래스카 한인소년병학교

생도들이 생활했던 하와이 오아후섬 아후이마누 병영의 1915년 모습.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박용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서 계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해외에서 무력항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꾀하겠다며 190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4년 정도 흐른 1909년 6월 네브래스카주 커니 지역의 한 농장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었다. 해외 최초의 독립군관학교였다.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인가를 받아내 군대에서 사용하는 총을 구입했고 군 출신 김장호에게 군사훈련을 맡겼다. 이듬해에는 인근 헤이스팅스지역의 대학(헤이스팅스대)으로부터 교실과 운동장 사용의 허락을 받아낸 뒤에 학교를 대학 구내로 옮겼다.


이곳 학생들은 평소에는 각자 다니던 학교에서 공부하고 6∼8월 여름방학 3개월 동안 헤이스팅스학교에 들어왔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는 힘든 생활이었다.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전병’으로 만들어 독립전쟁에 대비하자는 박용만의 구상이 반영된 결과였다. 학생들은 군사학과 역사 수학 과학 등을 익혔다. 교육과정은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방식을 따랐고 3년제로 진행됐다.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에 한인공회를 만들어 모든 한인을 가입시킨 뒤 한 사람당 매년 3달러씩 내도록 해 학교 운영자금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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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소년병학교는 1914년까지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용만이 1911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돼 떠나면서 약화됐지만 한인소년병학교는 재미 한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이후 미주 지역에서 활발했던 군인양성운동의 기폭제가 됐다.(‘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멕시코 한인들도 동참했다. 멕시코 한인 중 200여 명이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대상으로 1909년 5월부터 매일 1, 2시간씩 병법체조를 가르쳤고 1910년 2월에는 생도 33명의 숭무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 경술국치 비보에 군인양성운동 확산


경술국치(8월 29일)가 임박한 1910년 7월 4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공동대회에서 일본을 적국으로 정하고 대응활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외교적인 선전전과 군사인재 양성을 담은 9개항의 결의안이 통과됐고, 이를 추진할 애국동맹단도 결성됐다. 군인양성운동을 통한 독립전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는 의미였다. 애국동맹단이 결성된 건물은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가에 현재도 남아 있다. 이곳은 1909년 미 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합쳐진 국민회 총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1일 오후 현장을 방문했다. 총회관의 당시 모습은 사라지고 외관이 나무로 장식된 3층 개인주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와이지방총회도 7월 4일 호놀룰루에서 대표회의를 열고 항일 투쟁과 군인양성사업을 담당할 대동공진단을 조직했다.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은 무예장려문을 발표하고 군사교육 교재도 출간했다. 이후 재미 한인사회에서 군인양성운동이 본격화되면서 1910년 말까지 캘리포니아 캔자스 와이오밍 등에서 훈련반 의용훈련대 소년병학원 등이 조직됐고 군사훈련이 진행됐다.

하와이의 군사훈련은 다른 지역보다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10년 11월 연무부를 만들어 다수의 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매일 저녁 목총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군사훈련에 참가한 한인들은 2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하와이 한인 300여 명이 의병대를 조직해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한국으로 출발했으며, 미 본토와 멕시코 주재 한인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고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일제는 재미 한인들의 군인양성운동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하와이 지역 군사훈련 움직임을 담은 첩보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 박용만의 ‘산 넘어 병학교’

네브래스카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웠던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자신의 꿈을 크게 펼칠 기회를 잡았다. 1912년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 주필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 받아 한인자치제를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업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의무금제도도 관철시켰다.

1941년 미일전쟁 이후 재미 한인들이 미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달고 다닌 배지.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박용만은 1914년 6월 오아후섬 카할루에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사관학교’를 창설했다. 한인들은 농장주와 경작 도급계약을 맺은 파인애플 농장을 군단에 넘겨주고 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군인양성운동을 적극 도왔다. 군대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아예 교관으로 참여했다. 군단 막사 낙성식은 국치일인 8월 29일 한인 6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권영신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은 “당시 하와이는 미주 지역 최대의 한인사회였다”며 “박용만은 자신이 주장해온 무력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하와이로 가서 육군사관학교처럼 먹고 자고 하는 군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와이군사령부는 박용만에게 군단 설립을 인가하면서도 실제 총기 사용은 허가해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군단에서 기숙하면서 농장에서 노동하고 틈틈이 군사훈련을 받을 때 목총을 이용해야만 했다. 교과 내용은 한인소년병학교의 것을 발전시켜 28종의 교재를 사용했다. 호놀룰루의 동북쪽 큰 산 너머 계곡에 군영이 위치해 학교는 ‘산 넘어 병학교’, 생도들은 ‘산 넘어 아이들’ 또는 ‘우리 독립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군단 학생은 103명에서 시작해 300여 명으로 늘었고, 조국광복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에 사기도 높았다.(‘미주 한인의 민족운동’)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미국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은 일제는 1915년 여름 미 국무장관에게 대조선국민군단의 활동 중단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하와이 총독에게 박용만과 추종자들의 무기 소유 여부와 일본 내정 간섭 및 반란 선동 여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압박을 받은 하와이 주정부는 하와이지방총회에 승인했던 특별경찰권을 취소했다. 이즈음 외교론을 중시하는 이승만 계열이 하와이지방총회를 장악한 것도 악재였다.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던 하와이지방총회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인애플 흉작으로 수입이 줄고 농장주가 미 정부의 압력을 의식해 농장 도급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서 대조선국민군단은 결국 1917년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한인들의 군인양성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불꽃을 피웠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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