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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주동자 구출” 日헌병대건물 진입한 54명 집단학살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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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주동자 구출” 日헌병대건물 진입한 54명 집단학살 당해

안영배 논설위원 입력 2019-10-26 03:00수정 2019-10-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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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7화> 평남 맹산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본 군경의 총격에 살해된 한국인들의 장례식. 사진은 3·1운동 영문화보집 ‘조선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에 수록된 것으로 어떤 지역에서 벌어진 참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박환 제공
“(1919년) 3월 초순 이 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고 난 후 56명이 헌병대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갔다. 그들이 헌병대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이 굳게 닫혔다. 헌병들이 담 위로 올라가더니 들어왔던 사람들 모두를 쏘아 죽였다. 그러고는 내려와서 죽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총검으로 다시 찔러 죽였다. 53명이 그곳에서 학살당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나중에 그 주검의 더미에서 기어 나와 탈출하였다. 그들이 계속 살아 있는지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한 여성 기독교인이 며칠에 걸쳐 여행한 끝에 그의 외국인 친구에게 위의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재한 선교사 보고 문건)

미국인 선교사 모펫 등이 본국에 보고한 이 문건은 현장에 있던 여러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문제의 사건은 1919년 3월 10일 대동강이 발원(發源)하는 산간 지역인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발생했다.

만세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일제가 저지른 집단학살 만행 중 대표적인 게 ‘제암리 사건’이다. 1919년 4월 15일 일제는 경기 수원군 제암리 예배당에 23명을 가둬놓은 뒤 건물에 불을 지르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해 몰살시켰다. 이 사건은 스코필드 등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외부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 이보다 한 달여 앞선 시점에 일제는 맹산에서 비슷한 집단 학살사건을 자행한 셈이다.


‘북한판 제암리 사건’이라 불릴 맹산 학살의 피해 규모는 제암리보다 컸다. 사망자도 제암리의 배가 넘는 54명이나 된다. 선교사의 보고보다 1명이 더 많은데, 51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상을 입고 도망하던 중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38식 보병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한 일제 군인과 헌병들은 모두 66발의 실탄을 쏴댔다.(‘조선소요사건의 사상수 건보고’, 1919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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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산 사건은 일제가 3·1운동 초기부터 만세운동 참여자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음을 보여준다. 또 3·1운동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인명 피해가 컸던 사건이다. 하지만 남북이 분단되면서 그동안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 천도교 맹산 교구

천도교 평양교구 예배당. 평양을 중심으로 주로 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평안남도에서는 일제의 종교 탄압으로 많은 천도교도가 학살당하고 예배당이 폐쇄됐다. 천도교 제공
맹산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인들이 주도했다. 천도교 맹산교구의 원로 지도자 방기창은 경성의 천도교 중앙총부를 왕래하다가 천도교가 주축이 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방기창은 맹산 지역 천도교인으로는 유일하게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직접 챙기는 ‘봉황각 수련’에 참여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이다.

경성의 천도교 지도부는 3월 1일 낮 12시에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이 사실을 각 교구에 통보한다. 당시 경성에 있던 방기창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맹산으로 귀향한 뒤 맹산교구 내 각 전교실에 이를 알린다.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미리 인쇄된 독립선언서(최종 완성본은 아닌 것으로 추정)도 그해 2월 24일 맹산 교구에 전달됐다.(박연수 증언, ‘맹산교구의 만세운동·신인간 1989년 3월호’)

맹산의 만세운동은 공식적으로는 3월 6일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령에 따라 3월 1일 낮 12시에 시작됐다. 당시 보통학교 2학년생 김득홍(1906년생)은 “(3월 1일에) 55명의 천도교도가 박창도를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다”면서 “학교 수업 중에 시장 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갔다”고 증언했다. 또 “이튿날인 2일 낮 12시에도 천도교 청년들로 구성된 55명이 또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헌병과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다”고 덧붙였다.(김득홍 증언, 신인간 1989년 3월호)

이렇게 시작된 맹산의 만세운동은 장날인 3월 6일 규모를 대대적으로 키운다. 맹산교구장 문병로, 방기창, 정덕화, 김치송, 박창도, 이관국, 방진항 등 천도교 간부들이 5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맹산면 소재지에서 독립선언서를 공식 배포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수백 명의 군중이 합세했다.

이날 시위는 출동한 일제 헌병들에 의해 강제 중단된다. 하지만 만세운동의 열기는 꺾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맹산군수와 맹산 헌병분견소가 해산을 종용했지만 시위는 이튿날에도 계속됐고, 인근 지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3월 9일에는 지방 촌락의 교인들도 맹산읍내에 모여 만세를 외쳤다. 기독교인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더 커지고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 의도된 학살


진압에 한계를 느낀 맹산 헌병분견소장은 인근 덕천 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한다. 맹산 덕천 등 평남 지역을 관할하는 일본군 보병 제77연대는 이노우에(井上) 중위와 10명의 병력을 긴급히 파견한다. 이들은 3월 9일, 맹산 바로 북쪽에 위치한 영원군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천도교인들을 총으로 쏘아 이미 15명의 사망자와 38명의 부상자를 낼 정도로 성품이 포악했다.

3월 10일 오전 9시 20분, 이들이 맹산에 들이닥쳤다. 맹산 헌병분견소는 천도교인 100여 명이 이날 오후 3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사전에 진압하기 위해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오후 2시 천도교인 100여 명을 맹산공립보통학교 앞에 집합시킨 뒤 해산을 명하고 주동자 4명을 헌병분견소로 잡아가려 했다. 교인들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5명이 분견소로 끌려가고 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덕홍은 이같이 증언했다. “(맹산 헌병분견소에 구인된) 박창도가 증파된 완전무장 군인들의 철수를 요구하자 맹산 헌병분견소장 사다케(佐竹)가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박창도가 의자로 헌병을 내려쳤다.”(‘맹산교구의 만세운동·신인간 1989년 3월호’)

‘맹산군지’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박창도를 헌병분견소로 구인해 시위 중지를 강요하며 고문하려 하니, 박창도는 분연히 ‘시위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자주독립 의사이므로 당연한 주장이요, 누구도 제압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을 토하며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심문하는 헌병에게 던졌다.”

이 과정에서 카이젤 수염이 난 잘생긴 외모에 힘이 장사였던 박창도는 죽임을 당한다. “옆에 있던 사토(佐藤) 상등병이 권총으로 박창도를 쏘았다. 복부에 총탄을 맞은 박창도는 고통을 참으며 사토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억센 힘에 의해 목이 졸린 사토도, 총에 맞은 박창도도 같이 죽었다.”(김덕홍 증언)

이 사실에 격분한 시위대는 헌병분견소로 진입을 시도한다. 이때 이노우에 중위가 군인과 헌병을 건물 밖으로 나오게 한 뒤 건물 안에 들어간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한다.


○ 조작된 기록


일제는 이날 상황에 대해 폭도(시위대)가 시위 주모자를 탈취하기 위해 먼저 돌을 던지고 건물 안까지 들어가 헌병을 구타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조선총독부, 평남기밀 제118호)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도 거들었다. “군중이 (헌병분견소) 사무실에 돌입하여 폭행하였으므로 헌병 및 보조원은 방어코자 하여 대격투가 시작되었는데, 마침내 헌병 상등병 좌등연 씨는 다수의 군중과 용감히 격투하다가 죽고, 박 보조원 감독은 중상을 당하였고, 사무실 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다른 헌병과 보조원 등은 마침 응원하러 온 보병과 뒤뜰에서 협력해 발포해 격퇴했다.”(매일신보 1919년 3월 13일자)

박창도에 대한 사격 사실은 쏙 뺀 채 시위대가 헌병분견소에 들이닥쳐 먼저 폭행을 행사해 방어 차원에서 군경이 시위대에 총격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선교사 모펫의 보고는 정반대다. 그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폭력을 행사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위대에 군인들은 총을 쏘았다”고 밝혔다. 북한지역 3·1운동을 연구해온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일제의 기록은 자신들의 인명 살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으로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당시 순국한 이들은 일제 군경에 의해 산골짜기에 버려졌다. 이후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던 천도교 맹산교구는 1년 넘게 헌병대와 경찰에 강점당했다. 일제는 배일(排日)의식이 강한 천도교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략’은 맹산군의 만세시위를 ‘천도교인의 참사’로 소개하고 있다.


▼ 일제 총칼에… 민간인 사망자 553명중 평안도 231명 최다 ▼

평남 124명-평북 107명 순국
“평안도 반일 종교단체 세력 강해일제가 종교인 학살해 와해 노려”

맹산 3·1운동 시위대에 집단 학살을 명령한 보병 제77연대 본부 건물(평양 소재)과 일본 헌병대. 사진 출처 ‘일본통치시대의 조선’(일본에서 간행된 사진집)
일제 총독부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표방한 3·1운동에 대해 첫날부터 총을 발포하는 폭압적 방식으로 대응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경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성명을 발표한다. “(3월) 3일에 거행될 (고종) 국장을 앞두고 애도의 지정(至情) 대신에 황당무계한 유언비어로 민중을 선동하고 무엄한 일을 감행하는 무리가 있다면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조선총독부관보, 1919년 3월 1일)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조선총독부의 ‘엄중 처단’ 방침이 사실상 일본 군경의 발포 명령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폭압적 만행은 대부분 평안도 지역에서 벌어졌다. 평안남도 선천에서는 3월 1일 질서 있게 행진하던 시위대를 향해 일경이 총탄을 발사해 강신혁이 현장에서 죽고 주민 12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총에 맞아 다친 5명이 병원에서 모두 숨지는 일도 있었다. 2일에도 평남 강서군에서 일본 헌병들은 독립만세 소리가 나자마자 발포를 시작해 한 남자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이들은 도망가는 어린 소년의 등에 총탄을 퍼붓기도 했다.(재한 선교사 보고자료, 1919년 3월 6일)

일제는 시간이 흐르며 만세운동이 확대될수록 광분했고 피해 규모는 커져만 갔다. 3월 4일 평남 강서군 사천시장에서는 사망자 9명(한국 측 기록 50명), 9일 영원군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각각 냈고, 10일 맹산에서 최대 규모의 집단 학살극을 벌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소요사건 총계일람표’(1919년 6월 30일)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전체 민간인 사망자 553명 가운데 평안남도가 124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 평안북도가 107명으로 뒤를 이었다. 일제가 축소 왜곡한 통계에서도 전체 사망자의 40%가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셈이다.

이정은 원장은 이에 대해 “평안도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반일의식이 강한 종교단체가 중심이 돼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며 “일제는 종교인들을 응징함으로써 만세운동의 와해를 노렸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천도교세가 강했던 평남의 경우 천도교 조직이 와해되면서 3월 11일 이후 만세운동이 급감했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3·1운동 100년#평남 맹산#만세운동#천도교#집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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