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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선 목사 사택서 시작된 ‘독립열망’… 日帝 도끼-총으로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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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선 목사 사택서 시작된 ‘독립열망’… 日帝 도끼-총으로 탄압

성동기 기자 입력 2019-08-31 03:00수정 2019-08-3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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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1화> 함북 성진-명천
의료를 통한 선교를 하기 위해 성진에 제동병원을 세운 그리어슨 목사는 한국 독립운동의 후원자였다. 사진은 그리어슨 목사(앞줄 가운데)가 제동병원을 배경으로 한국인 직원들과 단체 촬영을 한 모습. 사진 출처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머지않아 중앙에서 경천동지할 민족적 거사가 있을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9년 2월 중순. 함흥의 학생단체가 파견한 박승봉은 함경북도 성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뒤 거사 준비를 당부했다. 이후 강학린 목사를 비롯해 김상필 강희원 김영배 등은 기독교계 병원에 모여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했다. 하지만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깊은 논의가 불가능했다.

이들은 캐나다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돼 성진에서 활동 중인 로버트 그리어슨(한국명 구례선) 목사의 사택을 회동 장소로 이용하기로 했다. 외국인이어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쉬울 것으로 여긴 것이다. 신학과 의학을 전공한 그리어슨 목사는 1901년 성진에 정착한 뒤 제동병원, 욱정교회, 보신학교, 협신학교 등을 세워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캐나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계가 주도한 성진 만세운동은 3월 10일 거행된다. 함북지역 최초의 만세 시위였다. 1919년 당시 일제는 러시아, 중국 만주 등과 국경을 접한 함북에 전국 최고 수준의 헌병 병력을 배치하며 강도 높은 경계활동을 펼쳤다. 당시 일제 헌병 1명이 책임지는 조선인 수는 함북이 598명으로 전국 평균(1874명)을 크게 밑돌았다. 그만큼 삼엄한 감시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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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거행된 성진의 만세운동은 이후 길주 명천 경성 청진 등 인근 지역의 시위로 이어졌다. 특히 명천에선 5000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성진 시위가 함북 지역의 독립에 대한 열기를 폭발시키는 뇌관이 된 것이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 푸른 눈의 선교사가 도와준 독립운동


강학린 목사가 욱정교회 신도들과 함께 그리어슨 목사의 사택을 찾아간 것은 3월 7일 저녁이었다. 모임을 위해 방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그리어슨 목사는 “친구가 친구를 찾아와 이야기를 하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승낙이 필요하냐”며 흔쾌히 허락했다. 평소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리어슨 목사는 이후 거사 논의에도 참여한다.

함북 최초의 성진 만세운동은 명천 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왼쪽부터 성진 시위를 주도한 강학린 목사, 성진 시위를 후원한 그리어슨 목사, 명천 시위에서 활약한 동민수 동풍신 부녀.
김상필 등 교회 청년들은 이날부터 목사관 내 고용인 주택에 보신학교 등사판을 가져다 놓고 함흥 영생학교 졸업생 허용필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베껴 3만 장을 인쇄했다.

3월 9일 열린 일요 예배 때 그리어슨 목사는 성경을 인용하며 교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날 예배에는 정세 파악을 위해 서울을 다녀온 2명이 참석해 있었다. 이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며 서둘렀다. 이에 다음 날이 거사일로 정해지고 비상 연락망이 가동됐다.

이튿날 오전 10시, 그리어슨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제동병원 앞 광장에 욱정교회 교인 등 수천 명이 모였다. 강학린 목사 등이 선언서를 낭독한 뒤 단체로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다. 일제 경찰은 기세에 눌려 어쩔 줄 몰랐다.(‘독립운동사’)

이날 오후에는 기독교계 보신학교 학생 40여 명과 교인 200여 명이 일본인 상가와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일경의 검거 시도에 맞서 투석전이 펼쳐졌지만 강학린 목사 등 주동자들은 결국 체포되고 만다.



○ 폭압적인 진압 과정에 인명 피해 발생


시위대에 혼쭐이 난 일제는 나남에 주둔 중인 기병대 일부를 성진에 파견한다. 10일 밤 도착한 기병대 장교, 하사 14명과 함께 일제 군경과 소방대 등은 11일 아침부터 무차별 보복에 나선다. 이로 인해 1명이 숨지고 중경상자들이 속출했다.

그리어슨 목사가 쓴 선교수기에는 당시 처참했던 상황이 생생하게 소개돼 있다. “3월 11일 이른 아침부터 일본인 소방대들은 도끼를 들고, 경찰들은 총을 들고 일본인 거리에서 한국인 거리로 들어와 한가로이 쉬고 있는 한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치고 도끼질하고 총을 쏘았다. 죄 없이 (도끼에) 찍히고 총에 맞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부상자들이 속속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습격 소식에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다시 제동병원 앞에 모였다. 사전 계획이 없었지만 11일 오전 10시경에 이미 그 수가 700여 명에 달했다. 시위대가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자 일제는 기병대, 재향군인, 소방대 등 100여 명을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이 쏜 총탄에 1명이 숨지고 9명이 부상했다. 같은 날 오후엔 보신학교 학생 45명과 주민 200여 명이 군청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 명천에서 폭발한 분노


성진 시위로 촉발된 독립에 대한 열기는 길주군을 거쳐 명천군까지 번져갔다. 길주에서 진행된 만세운동 소식은 명천군의 최남단인 하가면 화대동에 가장 먼저 전해졌다. 주민들은 일제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쌓인 울분을 이 기회에 풀어보자고 다짐한다.

3월 14일 만세시위가 진행된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거사 당일 ‘관을 사(辭)하고 운동에 참가하라’는 내용의 협박장이 명천군수에게 전달된다. ‘대한독립협회’ 이름으로 보내진 이 협박장은 명천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烽火)가 됐다.(‘함북 명천의 독립만세시위와 동풍신’)

14일 오전 11시 하가면 화대시장에는 5000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5000명은 일제의 공식 문서인 ‘조선소요사건경과개람표’에 수록된 수치로 함북에서 발생한 만세시위 가운데 최대 규모다.

시위대는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를 향해 행진했다. 분견소 앞에 도착하자 만세 함성은 더 커졌고 놀란 일제 헌병들이 총을 마구 쏘면서 5명이 현장에서 숨졌다.(‘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분노한 시위대는 이튿날 다시 면사무소로 몰려가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며 주민들을 괴롭혀온 면장 동필한을 끌어냈다. 이날 시위는 박승룡 김성련 등이 주도했다.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 대열에 참가해 같이 만세를 부르자”는 시위대의 요구에 동필한은 “나는 조선 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버텼다. 말로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시위대가 위력을 행사하자 면장은 헌병분견소로 달아났다. 그를 쫓던 시위대는 헌병분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면장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때 길주에서 지원 나온 기마헌병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고, 4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 ‘명천군의 잔 다르크’ 동풍신의 희생


15일 시위 때 숨진 4명 중 한 명은 하가면 지명동에 살던 농부 동민수(건국훈장 애국장)였다. 몸이 불편해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14일 시위에서 참가자 5명이 일제의 총격에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15일에도 시위가 있다는 말을 듣고 3km 떨어진 화대로 달려갔고, 시위대 선두에 섰다 총탄에 쓰러진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의 둘째 딸 동풍신(건국훈장 애국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대성통곡한 뒤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며 화대로 향했다. 소복 차림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타난 동풍신은 아버지 시신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일군이 겨누는 총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16세 소녀의 용기에 골목에 숨어 있던 군중이 다시 시위 대열을 정돈했다.(‘명천군지’)

이때 면장이 일군을 불러들였다는 얘기가 시위대 사이에 퍼졌다. 동풍신이 앞장선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면장 집에 불을 질렀다. 기마헌병들에게 체포된 동풍신은 함흥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일제는 동풍신의 마음을 돌리려고 화대가 고향인 화류계 출신 여성을 같은 감방에 넣었다. 이 여성은 일제가 시키는 대로 “네 어머니는 네가 잡혀간 뒤 혼자서 외롭게 지내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다가 너무 상심한 끝에 실신해 너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떠났다”는 거짓말을 한다. 동풍신은 이 거짓 정보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의식을 회복한 뒤에도 식음을 끊고 버티다 옥중에서 숨졌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어린 소녀가 만세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고 감옥에서 옥사했다는 점에서 유관순 열사에 비견되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판결문 등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시위 참여 이유에 있어서도 동풍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가족적인 동기가 더 컸고, 유관순 열사는 서울에서 여러 차례 시위에 참여한 뒤 고향에 내려가 시위를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 독립운동가들에 ‘치외법권 공간’ 제공한 제동병원 ▼

총칼 상처 싸매주고 은신처 역할… 본보 정간뒤 속간되자 축하광고도


1921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제동병원의 속간 축하 광고. 동아일보DB
‘성진예수교 선교사 구례선은 제동병원에서 스스로 독립선언서를 등사판으로 다수 등사해 배부한 혐의로 내사 중에 있으며….’(1919년 3월 13일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14보)

‘예수교도들을 선동한 혐의가 있는 구례선은 자택에서 신도 150명이 모인 집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암시한 바 있음.’(1919년 3월 23일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4보)

일제는 이처럼 여러 기록을 통해 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그리어슨(한국명 구례선)이 독립운동을 도왔다고 결론짓고 있다.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그리어슨은 1898년 서울을 거쳐 1901년 성진에 정착한 뒤 병원, 교회, 학교를 세웠다. 그는 목사이자 의사였고 또한 교육자였다.(‘성진시사’)

그는 실제로 독립운동 지원에 적극 나섰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을 보호하려고 노력했고, 독립운동가들은 치외법권 공간인 제동병원을 적극 활용했다.(‘일제하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료와 조선인 의사’)

자신의 사택을 시위 준비 장소로 제공하고, 거사 계획 논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총칼에 부상을 입은 주민들은 그리어슨의 제동병원에서 치료받았다. 그는 교인들이 체포돼 감옥에 갇혔을 때 용기를 잃지 말라고 교회 종을 치기도 했다.

그리어슨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건국훈장 대통령장)과도 인연이 있다. 일제의 집중 감시를 받았던 이동휘는 1912년 그리어슨을 찾아가 전도사로 일하다 북간도로 망명한다. 그리어슨은 이동휘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부흥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구실을 만들어 국경까지 배웅했다.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던 동아일보가 1차 정간 뒤 1921년에 속간되자 축하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성진 시위 주동자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거사 계획을 논의한 그리어슨 목사 사택. 사진 출처 ‘성진시사’
1993년에 발간된 ‘성진시사’에 따르면 동해가 바라보이는 해안가에 위치했던 그리어슨의 사택은 일제강점 말기 화재로 사라졌다.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외국인과 선교사를 감금하고 건물 등을 적산으로 몰수했다. 그리어슨 사택은 일제에 동조하는 인물에게 넘겨졌는데 한국식 온돌방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하다 불이 나 소실됐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3·1운동 100년#구례선 목사#그리어슨#기독교#만세운동#동풍신#제동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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