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진석]“日帝 탄압에도… 3·1운동 정신 동아일보 지면으로 계속 타올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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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과 동아일보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결실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고 민족정신 함양과 문화창달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결실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고 민족정신 함양과 문화창달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지지

동아일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독립 민주정신을 계승하여 창간됐다. 1920년 4월 1일은 민족대표 33인과 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한 인물을 포함한 48인이 민족운동 사상 가장 엄중한 재판을 앞둔 시기였다. 앞서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1919년 4월 11일에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선포문’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간명하게 규정하였다. 9월 11일에 선포한 ‘임시헌법’ 제1조도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으로 명문화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在)함’(제1장 2조)이라 하여 국권 상실 이전의 전제 군주제를 폐지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제를 선언했다.

동아일보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는 제2의 독립선언문으로 평가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 신문 탄생의 역사적 의미와 사명을 압축적으로 서술했다. 한일 강제 병합 후 무단정치 10년간은 “곧 죽음의 땅이자 함정이라, 자유와 발달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면서 “조선 민중은 그의 의사를 표현하며 앞길을 인도하는 친구가 될 자를 열망으로 기대하였도다. 이에 동아일보가 태어났으니, 그가 어찌 우연하다 하리오. 실로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생(生)하다 하노라”는 말로 신문 창간의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창간사에 담긴 3대 주지는 첫째,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自任)하며 둘째,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셋째, 문화주의를 제창했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항목은 상하이 임시정부 헌법을 그대로 반영했다.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민족의 대변지를 자처하여 창간 첫 호부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구속, 재판 기사를 파격적인 비중으로 다뤘다. 민족대표 48인을 포함해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옥중에서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지만, 3·1운동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3·1운동을 주도해 재판을 받은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을 담은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3면. ‘금일이대공판’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었다. 동아일보는 3·1운동을 활자로 재현하기 위해 3·1운동 지도자 48인에 대한 재판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DB
3·1운동을 주도해 재판을 받은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을 담은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3면. ‘금일이대공판’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었다. 동아일보는 3·1운동을 활자로 재현하기 위해 3·1운동 지도자 48인에 대한 재판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DB
창간 첫 호에는 ‘47인의 공판, 세 길이 넘는 기록을 조사하기에 판검사 아홉 명이 매달려 있다. 늦어도 금년 말에나 결말이 날 듯’이라는 제목으로 판사 3명, 검사 6명이 매달려 작성한 예심기록을 쌓아놓은 분량이 사람 키 높이 세 길에 이른다는 기사가 실렸다. 4월 6일자(지령 제4호)부터 13일까지는 48인의 예심결정서를 8회에 걸쳐 게재했다.

공판은 1920년 7월 12일부터 정동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에서 열렸다. ‘금일이 대공판(大公判)/만인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당국의 처치는 어떻할지’라는 제목으로 민족대표의 사진을 거의 한 페이지를 할애해 게재했다. 3·1운동 주역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한 역사적인 편집이었다. 체포된 민족대표가 48인에서 47인으로 한 사람이 줄었던 이유는 양한묵(천도교)이 재판을 받기 전 1919년 5월 16일에 옥사했기 때문이다.

평양의 만세소요로 첫 압수

지령 13호를 발행했을 때 동아일보는 발매 금지 및 압수 처분을 당했다. ‘평양에서 만세소요’(1920년 4월 15일)라는 기사가 문제였다. “평양에서 14일 오후 2시 약 4백명의 청년이 만세를 부르고 많은 시민이 이에 호응하자, 경찰은 크게 놀라 발포하는 등 약 20분간에 걸쳐 전 시가를 뒤덮는 소란이 일어나 구속된 자가 수십명에 달했다”는 내용이었다. 민간지 창간 후 첫 발매 금지였는데 이튿날인 4월 16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7월 14일자 ‘전개된 독립운동의 제1막’ 기사는 최린,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김도태가 재판장의 신문에 당당한 태도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판사와 피고인의 일문일답을 통해 3·1운동을 모의하는 과정이 한 페이지 전체 지면에 실렸다.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송진우는 1년 7개월 복역 끝에 1920년 10월 30일 출옥하여 동아일보 사장을 세 번이나 맡아 김성수와 함께 항일언론을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이었다. 최남선, 현상윤도 장차 동아일보에 참여하는 인물들이다.

공판이 7월, 8월, 9월까지 진행됐는데 사회면 대부분을 공판기사로 채웠다. “독립의 의지, 운동의 동기는 뼈에 사무친 압박의 채찍과 망국의 원한, 4천년 역사가 있는 조국을 일본에 빼앗김은 참 원통”(1920년 9월 24일), ‘초목에 맺친 이슬까지도 망국의 눈물인가’(9월 25일)와 같은 감상적인 부제를 달았다. 전 국민의 이목을 끌고 관심이 집중되도록 편집한 지면이었다.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비참한 정황도 신문에 실렸다. 동아일보 창간 전인 1919년 9월 2일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를 타던 때에 수류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의 장남 강중건이 전하는 옥바라지의 어려움도 널리 알렸다. ‘아 캄캄한 죽음의 손! 아 참혹한 굶주림의 귀신! 강우규의 말로(末路), 찌는 여름 철창 아래에 사형 우에 주림까지도’(1920년 8월 11일)라는 기사는 사형 집행의 날을 기다리는 강우규와 그를 옥바라지하는 가족의 비참한 정황을 묘사했다. 강우규는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대동단(大同團) 사건에 연루됐던 강매를 비롯한 4명은 면소(免訴)되어 1920년 6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30일자에 ‘대동단사건 관계자, 강매 씨 외 4인 출옥’ 소식과 함께 같은 지면에 ‘서대문감옥 후산(後山)에서 야반에 만세성’ 제목으로 “수십명 군중이 모여 크게 만세를 부르짖어”라고 보도했다.

‘황실의 존엄 모독’ 이유로 제1차 정간

임시정부에 관한 소식도 꾸준히 비중 있게 다뤘다. 1921년 2월 27일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사진과 함께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해 각부 장관에 해당하는 총장들의 명단을 실었다.

총독부는 마침내 동아일보에 정간을 명령했다. 직접적인 이유로 지적한 글은 9월 24일과 25일자 연속 사설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였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이 신념의 중추로 삼는 거울, 구슬, 칼 등 이른바 3종의 신기를 가지고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8월 30일부터 연재 중인 ‘대영(大英)과 인도’(9월 25일까지 14회 연재)도 문제였다. 20세기 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창간 후 여러 차례 발매 금지 처분을 내렸으며 그때마다 거듭 주의를 환기했고, 8월에도 발행인을 소환해 최후의 경고를 한 바 있었는데도 로마의 흥망을 논하면서 조선의 부흥을 말하며 이집트와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보도하면서 조선의 인심을 자극하고 영국에 대한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으로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독정치를 부정하야 일반의 오해를 심절(深切)케 함에 노력했다”고 정간 처분의 이유를 밝혔다.

총독을 정면 비판하고 사임 촉구

창간 2주년 1922년 4월 1일에는 총독 사이토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공개장’을 실었다. “사이토는 걸핏하면 동화주의(同化主義)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 무슨 주의를 말하지만 이는 조선인을 심히 모욕하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파렴치해도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인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문화에 동화하라는 것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내지연장주의는 조선을 위하여 불행이오 일본을 위해서도 또한 불리인즉 내지연장주의자인 그대는 조선총독이 되기에 명백히 부적합한 자이라. 이것이 우리가 그대의 사직을 권하는 제일의 이유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총독부는 이 글을 배일사상 또는 배일운동을 선전 고취하거나 선동 또는 찬양하는 기사로 분류했다.

동아일보는 3·1운동의 결실로 창간됐으며 임시정부의 항일 민주정신을 계승하여 탄생하였다는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자부심은 동아일보 99년의 역사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1운동 50주년인 1969년에 1078쪽에 달하는 방대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을 엮어냈고, 70주년인 1989년에는 ‘3·1운동과 민족통일’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해 책으로 발간했다. 앞의 논집에는 무려 76명에 달하는 학자와 연구자들이 기고했다. 당시 국내의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총망라된 논문집이었다. 1989년에 출간된 책에는 7명의 전문학자가 발표한 주제에 14명의 학자가 토론에 참여했다. 정부 없는 식민지 시기 동아일보가 수행했던 역할을 광복 후에도 이어갔던 사업이다. 동아일보는 ‘3·1운동과 민족통일’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동아일보로서는 3·1운동으로서 일제의 극악한 무단통치를 물리치면서 특히 언론·출판 등에 있어서 최소의 자유나마 한민족이 쟁취하였다는 점을 항상 명심하고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그 만세의 기운이 충만해 있던 시점에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며 동아일보는 창간됐기 때문이다. 3·1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의의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전국의 3·1운동 유적지를 찾아 12곳에 기념비를 세웠고, 이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3·1운동#동아일보#독립 민주정신#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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