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호부터 아일랜드 독립전쟁 조명 독립정신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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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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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년’ 논문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호 2면[1]에서 아일랜드 독립운동 소식을 알렸다. 이후 ‘애란 문제의 유래’라는 연재 기사를 4월 9일자 1면[2]부터 게재하며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함을 비판했고, 4월 9일자 3면[3] ‘독립 수령의 탈옥’ 기사에서는 부당하게 투옥된 아일랜드 독립군에게 동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7월 7일자 1면[4]에 실린 사설 ‘애란인에게 기하노라’를 통해서는 약소민족이 벌이는 독립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동아일보DB
1920년 9월 25일. 조선총독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동아일보를 창간 후 처음으로 정간시켰다. “동아일보가 아일랜드 문제를 말하여 조선의 인심을 풍자(諷刺)하고, 영국의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反逆心)을 자극했다”는 이유였다.

1919년 3·1운동의 열망으로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아일랜드의 독립전쟁 기사를 창간호부터 특집기사로 다뤘다. 같은 해 9월 25일 1차 정간 때까지 발행한 176호의 신문에서 무려 180여 건의 아일랜드 관련 기사를 실었다.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전쟁을 펼치는 아일랜드의 활약을 조명함으로써 일제에 맞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보도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학계에선 3·1만세시위의 후속 운동을 추적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한승훈 고려대 독일어권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3·1운동 경험자가 바라본 아일랜드 독립전쟁’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3·1운동의 결과물로 태어난 신생 일간지 동아일보가 주목한 아일랜드의 독립전쟁 보도를 분석했다. 이 논문은 최근 국내 대표적인 역사학회인 한국역사연구회 소속 학자 38명이 쓴 책 ‘3·1운동 100년 세트’(전 5권·휴머니스트)에 실렸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와 초대 주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등은 일본 유학생 출신인 ‘신지식인’이었다”며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되는 세계사적 흐름을 읽고 아일랜드, 이집트, 인도 등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컸는데 특히 아일랜드에 관심이 높았다”고 밝혔다.

○ 아일랜드와 조선, 약소국이라는 공통분모

동아일보 1920년 5월 31일자 2면에 실린 ‘애란(愛蘭)과 영수상(英首相)’이라는 제목의 그림.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은 맹렬하게, 영국 수상은 납작하게 표현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31일자 2면에 실린 ‘애란(愛蘭)과 영수상(英首相)’이라는 제목의 그림.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은 맹렬하게, 영국 수상은 납작하게 표현했다.
“8000명의 신페인당원은 아일랜드공화국의 제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여했다.”

동아일보의 아일랜드 독립전쟁 보도는 창간호인 1920년 4월 1일자 2면 ‘독립당 시장의 장의’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됐다. 이 기사는 1920년 3월 3일 영국군에게 피살된 아일랜드 독립세력 신페인당 지도자 토머스 맥 커테인의 장례식을 다뤘다. 곧이어 4월 9일자 ‘독립 수령의 탈옥’이란 기사에서는 영국에 대항해 감옥에 투옥된 이들을 “감옥에 갇히어 끓는 피, 아픈 가슴으로 철장 아래에 신음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주목한 점은 식민지 조선과 유사한 환경에 놓인 아일랜드의 현실이었다. 4월 9일부터 연재한 ‘애란(愛蘭·아일랜드) 문제의 유래’ 기사에서 아일랜드의 가톨릭 문화를 탄압하고 차별하는 영국의 역사·문화 말살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이 펼치는 식민지 경제 체제의 부조리함을 심층 보도했다. 4월 14일에는 아일랜드의 산업 억제 및 기업 침체와 영국인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과도한 소작료를 부과하면서 대기근과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한 사실을 알렸다. 4월 16일에는 독립운동의 선결 과제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영국인 지주를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한 교수는 “7월 7일 사설 ‘애란인에게 고하노라’를 통해 ‘오인(아일랜드)의 요구는 정당하다.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요구함은 결국 그 민족의 고유한 권리의 승인’이라며 노골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옹호하기도 했다”며 “동아일보는 당시 시대정신을 ‘약자의 부활시대’로 규정하며 무력과 압박으로 약소민족을 식민통치하는 제국주의 열강 세력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고 설명했다.

○ 독립의식 고취, 식민지 철폐 요구

동아일보의 아일랜드 보도는 독자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을 뿐 아니라 당시 통치기관이던 조선총독부에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칼라트쓰톤 재상의 계획이 성공하였으면 오늘날과 같은 참화는 있지 아니하였을지로데. (총독부가) 고정한 정책을 개혁하고 인도(人道)로 돌아가는 준비에 노력할지어다.”

동아일보는 1920년 8월 16일자 사설을 통해 1886년 영국 글래드스턴 총리가 추진했던 아일랜드 자치안을 언급했다.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지 않고, 자치안을 실행했다면 독립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3·1운동을 거울삼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도적인 정책을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보도와 함께 ‘신문화건설론’을 내세우며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세계 흐름에 맞춰 사회 각 분야의 실력을 양성하는 문화운동을 함께 제시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이 같은 요구가 독립을 향한 목소리라며 1920년 9월 25일 정간을 내리는 탄압을 자행한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는 가슴으로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던 아일랜드처럼 투쟁을 하고자 했지만 엄연한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며 “이에 신문화건설론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모습을 동아일보 기사의 행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3·1운동#한국역사연구회#동아일보#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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