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엔규약 50년 앞서 인간기본권 지평 넓힌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2019 새해 특집/3·1운동 100년]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이 말하는 ‘3·1운동 100주년의 의미’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3·1운동은 100주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전국의 총 시위 건수, 지역·일자별 시위 건수, 사망자 등 
기초 사실이나 통계가 정리되지 않았다”며 “연구자들이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만 계속 연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건 
학계의 수치고, 국가적으로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3·1운동은 100주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전국의 총 시위 건수, 지역·일자별 시위 건수, 사망자 등 기초 사실이나 통계가 정리되지 않았다”며 “연구자들이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만 계속 연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건 학계의 수치고, 국가적으로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3·1운동은 모든 민족은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천명하며, 유엔 규약보다 약 50년 앞서 인간 기본권의 지평을 넓힌 사건입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4)을 지난해 12월 21일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에 대해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 성립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광범하게 영향을 준 혁명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확산됐고, 지식인·학생이 중심이 됐다가 민중으로 전파됐다는 인식은 오해라고 강조했다. “거의 모든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였고, 주역은 민족 전체였다”는 것이다. 조 위원장은 “독립은 이뤘으니 분단의 극복과 민주, 복지국가 건설이 앞으로의 과업”이라며 “그 전범이 100년 전 3·1운동”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와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2월 하순에 공동주최한다. 조 위원장은 “동아일보사는 1950∼70년대에도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대규모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을 간행하고, 강연·토론회를 여는 등 3·1운동을 기억하는 사업을 꾸준히 펼쳐왔다”며 “이는 민족지로서 동아일보가 우리 민족운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3·1운동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동아일보의 그런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우리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자발적으로 합병을 바랐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았다. 그런 ‘페이크 뉴스’에 일격을 먹인 것이다. 독립 의지 표시 없이 독립국가가 생길 수 없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했다. 또 일제 식민통치 정책의 변경을 강박했다.”

―정치 측면 이외 다른 의미는….

“3·1운동은 우리가 스스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사건이다. 3·1운동은 192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근원이 됐다. 민족적 각성이 이뤄지면서 사회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례로 학교 진학률이 급격히 증가했고, 형평(衡平) 운동 같은 신분타파운동도 본격 전개됐다. 민족주의 사학의 발전과 민족 종교도 발전했다. 3·1운동은 근대적 사회 변화의 내재적 기점이다. 임정 탄생 등 정치적 결과만 강조하면 3·1운동의 의의를 오히려 축소하게 된다.”

―오늘날 새로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면….

“인간 기본권의 인식지평을 넓혀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1966년 유엔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보다 47년 앞서 민족이 독립된 국가를 가질 권리가 기본적 권리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세계 인권사의 발전에서도 3·1운동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3·1운동의 규모는….

“당시 조선 인구가 1679만 명이었는데 총독부 기록에 참여자가 106만 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6.3%가 참여했다. 물론 근거가 미흡한 구석이 있다. 야마베 겐타로나 신복룡 등의 연구자는 50만 명 내외로 본다. 그래도 인구의 3.0%다. 이 정도면 거의 전 국민이 참여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인류사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독립선언서만 봐도 최남선이 기초한 것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약 200건의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이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과 미래에 던지는 메시지는….

“3·1운동은 전근대 왕조체제에서 탈피해 민주공화제의 성립을 전망하고 추진한 사건이다. 오늘의 한국은 민주주의의 신념을 키워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공화정을 발전시킬 책임을 확인해야 한다. 또 독립된 국가를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국가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임을 확인시켜 준다. 100년 전 3·1운동을 벌인 선조들은 불가능에 도전해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 우리도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현실화해야 한다.”

―국제적인 측면은….

“3·1운동은 국제적 불의·부당한 일에 대한 저항이고 경고였다. 한국은 인류의 인권에 대한 기본적 감수성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탄압받는 민족과 인류에 대한 보편적 인류애를 강화해야 한다. 민족과 인류의 기아와 빈곤, 난민 문제를 비롯해 문화적 제반 권리를 제약하는 악조건을 개선하고 국제평화를 위하는 활동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3·1운동은 죽은 화석이 될 것이다.”

―독립은 이뤘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3·1운동은 사회적 계급을 초월한 전 민족이 일치해서 일으킨 운동이다.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이 제2의 민족운동이고, 두 번째 3·1운동이다.”

―일부에서는 3·1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어를 바꾸자는 주장도 나온다.

“일리가 있다. 3·1운동은 사회의 질적 전환을 추진하는 혁명적 성격이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광범하게 영향을 준 3·1운동은 프랑스 대혁명 못지않은 혁명적 사건이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라는 ‘뉴 아이디어’와 그 생각을 실천하는 힘, 즉 무력·폭력을 갖춰야 한다. 3·1운동은 기존 사회질서를 바꾸자는 것이었고, 비록 비폭력을 표방했지만 엄청난 희생자가 나오고 참여자도 넓었다. ‘파워’도 결합됐던 것이다. 물론 독립선언서가 비폭력을 지향했기에 ‘운동’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는 견해도 성립된다. ‘운동’으로 지칭하는 이들도 3·1운동의 혁명적 측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3·1운동의 혁명적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광복 전부터 계속 사용했던 용어와 관행을 존중해 3·1운동으로 불러도 된다고 본다.”

―3·1운동에 대한 오해는….

“3·1운동은 순식간에 확 번졌다. 소식만 듣고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거의 모든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였다. 운동의 확산 과정을 데이터베이스로 보면 드러날 것이다. 서울·중앙의 지식인·학생과 연계되지 않은 사람도 다 만세의 주역이었다. 각자가 그 지역에 맞는 조건과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서 전반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운동 양상도 횃불투쟁, 만세시위, 주재소습격, 격문배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했다.”

::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4) ::

1983∼2010년 고려대 사학과·한국사학과 교수

2001년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조선시대사학회 회장

2002∼2005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총간사

2003∼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2005년 고려대 문과대학 학장

2005년 안중근전집편찬위원회 위원장

2005∼2009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

2006년 전국사립대인문대학장협의회 초대 회장

2008년 한국사연구회 회장

2008∼2010년 고려대 박물관 관장

2010년∼ 고려대 명예교수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취임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광#3·1운동#100주년#의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