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뛰쳐나온 유생들… 日 통치기관 면장-면서기도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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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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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21화> 충남 당진 ‘도호의숙’

3·1운동 당시 일제의 경찰관 주재소가 있던 자리에 세운 당진시(당시는 서산군)  정미면의 ‘4·4독립운동기념탑’. 이곳 인근의 
천의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일경의 권총 발사로 4명이 중상을 입자 군중이 격분해 돌을 던지며 일경을 몰아내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사태로 비화했다. 당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 당시 일제의 경찰관 주재소가 있던 자리에 세운 당진시(당시는 서산군) 정미면의 ‘4·4독립운동기념탑’. 이곳 인근의 천의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일경의 권총 발사로 4명이 중상을 입자 군중이 격분해 돌을 던지며 일경을 몰아내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사태로 비화했다. 당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충남 당진 대호지면 사성리의 ‘남병사 댁’은 기미년(1919년) 3월 3일 고종 장례일을 앞두고 갓 쓴 사람들의 출입이 부쩍 잦았다. ‘남병사 댁’은 고종 때 장위영 경무사(병마절도사급)를 배출한 의령 남씨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성을 왕래하는 충청 유생(儒生)들은 이 집에서 쉬어가곤 했다. 잠시 식객으로 머문 유생들은 서산과 당진의 경계인 대호만의 대호지 포구로 나가 화륜선을 이용해 3시간 남짓 걸리는 인천 제물포로 상륙했다. 거기서 다시 기차(경인선)로 갈아타면 한나절 만에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귀향할 때도 육로보다 가깝고 편리한 해상 교통로를 택했다. 자연스럽게 ‘남병사 댁’은 경성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접해 주위에 퍼뜨리는 정보 창구가 됐다.

대호지면의 최고 부자이기도 했던 ‘남병사 댁’ 주인 남계창과 조카 남주원은 평소 집을 외부인에게 개방했다. 2400여 평의 드넓은 대지에 100칸은 족히 넘는 대저택은 시국을 걱정하는 애국지사들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묵객들로 늘 북적거렸다.(김상기, ‘민족교육의 산실 도호의숙’)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과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도 ‘남병사 댁’을 거쳐 서울을 왕래했다. 홍성 출신인 두 분은 남병사 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남기은 당진문화원 향토사학회 회장의 말이다. 남씨 문중은 이웃 지역 홍성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지휘한 거유(巨儒) 김복한(1860∼1924)과 교유하고 있었다. 특히 김좌진은 김복한을 스승으로 모신 인연으로 ‘남병사 댁’과 친분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 도호의숙의 유생들


경성에서 진행되는 3·1만세운동 움직임도 ‘남병사 댁’ 정보망을 통해 이미 대호지면 유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집주인인 남계창과 남주원은 2월 27일(혹은 28일)경 일찌감치 경성에 올라가 만세운동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뒤이어 경성에 도착한 대호지면 유생들(남상직 남상락 남상돈 이대하 이춘응 등)도 탑동공원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김남석, ‘대호지 3·1운동의 전개와 특성’)

상경한 유생들은 모두 의령 남씨의 문중 서당인 도호의숙(桃湖義塾) 동문이었다. 대호지면 도이리에 자리한 도호의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초빙하고, 남씨 문중 후손뿐 아니라 다른 성씨 인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등 ‘열린 교육’을 펼쳤다. 도호의숙은 한학 교육만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 교육에도 앞장섰다.

도호의숙의 이 같은 교육 방침은 의령 남씨 집안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집안 선조 중 남유는 1598년 정유재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했다. 그 아들 충장공 남이흥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의 군사들과 싸우다 안주성에서 순절했다. 부자 2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직계 후손인 대호지면 남씨들은 그 명예를 자랑스럽게 지켜왔다.

남씨 집안 인사들은 대한제국 시절 황성신문 등 언론에서 민족의 위난을 극복한 영웅담으로 조상인 남이흥의 충의정신이 소개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편으로 일제강점기 노량전적지에 세운 남유의 유허비가 고의적으로 멸실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는 가슴 깊이 분노를 새기고 있던 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학문을 닦던 도호의숙 학생들이 경성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서는 직접 시위에 참가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문제는 경성에서 구한 국기(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고향으로 무사히 빼돌리는 것. 이때 일행 중 한 명인 남상락이 꾀를 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백화점에서 신상품으로 내놓은 석유 램프를 이용하기로 했다. 긴 목을 가진, 당시로서는 최신형 석유 램프를 구입해 그 속에다 국기와 선언서를 돌돌 말아 넣은 뒤 백화점 포장지로 포장해 놓으니 감쪽같았다. 기차와 배에서 삼엄하게 검문 검속을 하는 일경을 피해 국기와 선언서는 대호지면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와 관련해 남상락의 아들 남선우 씨(2004년 작고)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984년 8월 15일자)에서 “부친 등 7명이 고종 황제의 인산일에 상경해 한용운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또 부친은 모친이 명주천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상락이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남상락 람프’로 이름 붙여진 램프와 명주천으로 만든 태극기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뒤 보관돼 있다.

도호의숙 학생 남상락이 경성에서 국기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들어오는 데 사용한 램프. 남상락 지사의 아들 남선우 씨(2004년 작고·오른쪽)가 목이 긴 램프를 손에 받쳐 들고 있다. 동아일보DB
도호의숙 학생 남상락이 경성에서 국기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들어오는 데 사용한 램프. 남상락 지사의 아들 남선우 씨(2004년 작고·오른쪽)가 목이 긴 램프를 손에 받쳐 들고 있다. 동아일보DB


○ 면장과 면서기도 나서다

고향으로 돌아온 도호의숙 유생들은 본격적으로 ‘독립 만세운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거사 과정에서 생사를 함께하기로 하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흥미롭게도 대호지면의 만세운동 추진위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말단기구인 면사무소 면장과 면서기(면사무소 직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그 시절 면사무소는 식민 통치를 원망하는 시위대의 공격 대상이 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대호지면은 사정이 달랐다.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면장 이인정은 경북 자인군(현재 경산시 일대) 군수를 지낸 뒤 대호지면 사성리의 전주 이씨 동족마을로 낙향했다가 61세 고령의 나이에 면장직을 맡고 있었다. 민재봉 김동운 강태완 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들도 이 지역 출신이어서 지역민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박상건, ‘당진지역 항일독립운동사’)

대호지면의 거사 계획은 면장-면서기-소사-구장(이장)으로 연계되는 관공서 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 보니, 순풍에 돛 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게다가 일제가 대호지면의 치안을 이웃 정미면 천의주재소(서산경찰서 관할)에 맡기고 있던 것도 만세운동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제는 대호지면은 정치·경제적으로 전혀 이익이 없는 지역으로 판단해 면사무소 이외에 별도의 통치 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다.(박걸순, ‘당진 대호지·천의장터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과 대호지면의 젊은 청년들 위주로 구성된 선봉 행동대는 3월 하순에 들어서면서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거사 날짜는 4월 4일, 장소는 대호지면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정미면 천의장터로 정해졌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호지면은 워낙 궁벽진 곳이라 장이 서지 않는 반면, 정미면의 천의시장에서는 이날 5일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만세운동 인원도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면장 명의로 ‘도로 보수 가로수 정리의 건’이라는 공문을 돌려 면내 각 호(戶)에서 1명씩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했다. 4월 4일 오전 8시경, 대호지면 면사무소에는 부역을 하기 위해 400∼500명의 군중이 집결했다. 그런데 면사무소 광장 한가운데는 흰 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가 30척(약 9m)짜리 죽간(竹竿)에 달려 펄럭거리고 있었다. 일제 강점 10년 만에 낯선 태극기가 대호지면 주민들에게 선을 보인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나온 일부 사람은 그제야 범상치 않은 모임임을 알아차렸다. 면장 이인정이 앞에 나서서 연설했다.

“여러분들을 집합시킨 것은 도로 수선 때문이 아니라 조선독립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니 각자는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나아가자.”

이어 ‘남병사 댁’의 남주원이 등단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도호의숙의 훈장 한운석이 스스로 지어놓은 애국가도 제창됐다. 다음은 천의시장으로 행진할 차례. 태극기를 맨 앞에 세우고 이인정 면장이 말을 타고 행진을 하자 군중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남주원은 군중이 용기를 내도록 술을 내어 대접까지 했다.(‘민족교육의 산실 도호의숙’)

○ 만세운동과 빚잔치

대호지면 시위대는 현재 ‘4·4 만세로’로 명명된 도로를 따라 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이동했다. 기자는 26일 당진으로 내려가 당시를 떠올리며 이 길을 걸어보았다. 3형제(남상돈 남상락 남상찬) 모두 도호의숙 유생이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의령 남씨 집안의 남기행 씨(남상돈의 손자)와 남기환 씨(남상락의 손자)가 동행했다. 남기행 씨는 길을 걸으며 역사 자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100년 전 할아버지가 주도한 만세운동 후일담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할아버지는 만세운동으로 8개월 감옥살이를 한 후, 이듬해인 1921년 34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대기 위해 엄청난 빚까지 지고 있었다. 그 빚을 갚느라 부모님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1950년대까지도 우리 집에서 지은 쌀농사는 가을 추수기만 되면 낱알을 털지 않은 볏단째 채권자에게 넘어갔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속상했다.”

만세운동의 여파가 40여 년간 독립운동가 집안에 무거운 짐을 지우며 남아 있었던 셈이다. 남기행 씨의 말 때문일까, 추수가 끝난 농촌의 들판이 황량하게만 보였다. 그런데 천의시장으로 가는 만세로를 걷다 보니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집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대호지 포구와 도호의숙, 대호지면사무소 일대 주택과 가게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거나 태극기 문양을 새겨 놓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3·1운동 당시 제작한 ‘명주천 태극기’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남선우 씨 아들 남기환 씨는 “이 지역에서는 태극기를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평시에도 당연히 걸어두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정미면 천의시장에 도착했다. 99년 전인 4월 4일 오전 11시경 대호지면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도착한 바로 그 시장이다. 당시 우시장까지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던 장터에서는 장꾼까지 합세해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천의시장과 정미면사무소, 경찰관 주재소 등지를 돌면서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대호지면에서 시위 군중이 천의장터로 행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은 일경의 귀에도 들어갔다. 천의 주재소 소속의 일본인 우에하라(上原)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가 출동해 해산을 명령했으나 군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세 시위는 오후 4시경까지 계속됐고 막 평화롭게 해산하려던 중이었다.

이때 천의 주재소로부터 응원 요청을 받은 당진경찰서 소속 니노미야(二宮)와 다카시마(高島) 순사가 현장에 출동해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순사들은 군중이 지니고 있던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군중이 이에 반항하며 투석으로 맞섰다. 위급함을 느낀 순사가 권총을 발사해 시위대 4명이 중상을 입는 등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평화롭게 해산하려던 시위 상황이 급변했다. 격앙한 시위대는 거세게 투석전을 벌이며 주재소로 도주하는 순사들을 쫓았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와 순사보를 붙잡아 발포한 연유를 따지며 구타했다. 순사들의 권총과 환도를 빼앗기도 했다. 이날 사건에 대해 조선군사령관이 일본 도쿄의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문은 이렇다.

‘서산군 천의에 내습(來襲)한 폭민(暴民)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 1인이 중상, 순사보 2인이 행방불명, 일본인 1인이 경상을 받다.’

일제는 곧 수비대를 파견해 21명의 시위 주도자를 체포했다. 그러나 격앙된 민심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천의 주재소를 폐쇄하고 이 지역에서 거류하던 일본인 14명을 서산으로 철수시켜야 했다.

시위대의 희생도 컸다. 천의장터에서 해산해 대호지면으로 돌아온 군중들은 이후 출동한 일경에게 체포됐다. 일시 피신했던 주모자들도 속속 체포됐다. 198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그중 13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시위 현장과 옥중에서 순국한 사람도 6명이나 됐다. 소단위 지역에서 벌어진 한 차례 시위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처벌받은 것은 국내 3·1운동사에서 찾아보기 드물 정도다.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당진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봉안한 창의사. 현재 600여 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만세운동 기념지임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당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당진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봉안한 창의사. 현재 600여 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만세운동 기념지임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당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기자는 천의장터를 둘러본 후 그 희생자를 추모하는 창의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남기찬 씨(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수석부회장)는 의령 남씨와 도호의숙 인물들이 만세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대호지와 천의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위패를 봉안한 창의사에는 의령 남씨 남이흥의 후손들만 모두 60명에 이른다. 또 도호의숙 유생들만 따로 추려 보면 21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도호의숙 유생들의 만세운동은 충청 유림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조선조 이래 국내 최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유림계(儒林界)는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명단에서 빠져 있던 데다 만세운동에서도 이렇다 할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호의숙 유생들의 만세운동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취재를 마치며 도호의숙의 스승이자 유학자인 한운석이 지은 애국가를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간교한 일본은 강폭(强暴)하게 주장하여/마침내 우리나라를 억지로 빼앗아/우리들은 이처럼 통탄과 만나게 되어/살아도 죽은 것 같고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다/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동심일체가 돼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고 무궁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선열들의 애절함과 원통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가사였다.

당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도호의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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