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도 자지 않고 달린 29시간…스페인 그란카나리아 섬에서의 마라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5일 14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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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울트라트레일 월드투어 한국인 최초 완주
화산폭발, 자연풍경 등 제주도와 흡사…벤치마킹 해야

국제트레일러닝협회 울트라트레일러닝 월드투어 시리즈인 스페인 트란스 그란카나리아 125km 대회 참가자들이 라스칸테라스 해변을 출발해 한계에 도전하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그란카나리아=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국제트레일러닝협회 울트라트레일러닝 월드투어 시리즈인 스페인 트란스 그란카나리아 125km 대회 참가자들이 라스칸테라스 해변을 출발해 한계에 도전하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그란카나리아=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어둠이 밀려들면서 레이스는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초반에 있던 흙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드문드문 포장길이 있지만 30㎞가량의 후반 코스는 끊임없이 이어진 돌길, 자갈길이다. ‘지옥의 구간’이라 해도 될 법했다. 국내에서 악명 높은 제주도 한라산 탐방로와 둘레길의 돌길은 ‘애교’ 수준이다. 한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통증이 발바닥에서 종아리, 무릎, 허벅지를 거쳐 몸 전체로 순식간에 전해졌다. 포기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때마다 ‘유일한 한국인 참가자’라는 자존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마침내 결승라인을 통과했다. 걸린 시간은 29시간24분4초. 스페인 라스팔마스주 그란카나리아 섬에서 열린 19회 트란스 그란카나리아(Trans Grancanaria) 125㎞ 대회에 참가한 기자의 완주기록이다. 지난달 23일 오후 11시(현지시간) 그란카나리아 북부 라스 칸테라스 해변을 출발해 한숨도 자지 않고 레이스를 펼쳐 24일 오전 4시 24분경 마스팔로마스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대회에 도전해 완주자가 됐다.

국제트레일러닝협회 울트라트레일러닝 월드투어 시리즈인 스페인 트란스 그란카나리아 125km 대회 참가자들이 라스 칸테라스 해변을 출발해 한계에 도전하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라스팔마스=임재영기자 jy788@donga.com
국제트레일러닝협회 울트라트레일러닝 월드투어 시리즈인 스페인 트란스 그란카나리아 125km 대회 참가자들이 라스 칸테라스 해변을 출발해 한계에 도전하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라스팔마스=임재영기자 jy788@donga.com
이 대회는 국제울트라트레일협회(ITRA)가 인증한 울트라트레일 월드투어(UTWT) 시리즈로, 스페인 최대 규모 트레일러닝 행사다. 트레일러닝은 산과 들 계곡 사막 등 주로 비포장을 달리는 아웃도어 스포츠. 100㎞이상이 기본 요건의 하나다. 대회가 열린 그린카나리아 섬은 화산 폭발과 관광지, 자연풍경 등에서 제주도와 흡사하다. 트레일러닝이 새로운 스포츠관광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제주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 대회 열리면 섬 전체가 축제장

다양한 국적의 886명(남자 787명, 여자 99명)이 125㎞대회 출발선에 섰다. 북쪽 해발 1m에서 출발해 1900m 가량의 코스 최고 지점을 통과한 뒤 다시 남쪽 해안으로 내려오는 섬 종단 코스로 짜여졌다. 10개의 산 정상이나 봉을 오르내리는 동안 오르막을 합한 누적 고도는 7500m에 이른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따라 백록담 정상을 7번 가량 왕복해야하는 난도다. 이 대회 출발시간은 이례적으로 야간이다. 참가선수에게 웅장한 섬의 장관을 보여주고 다음 날 낮에 골인하는 엘리트 선수들의 레이스 시간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정열적인 나라답게 응원은 뜨거웠다. 해변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은 마지막 선수가 지날 때까지 힘찬 박수를 보냈다. 일부는 축구경기 응원에 쓰는 ‘부부젤라’를 열심히 불어댔다. 도심을 벗어나자 하늘에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달 주변으로 오리온 별자리가 선명했다. 이방인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가 주택가에 울려 퍼졌다. 주택가나 산길에 계단이 없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주변 경치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모습의 선인장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제주에서 볼 수 있는 손바닥선인장도 보였다. 다육식물인 사기린 유포르비아, 오방락 아이오니움은 그란카나리아가 원산지라 자주 눈에 띄었다. 주택가 주변에서는 용설란과 비파나무 감귤나무 레몬나무가 자랐다. 출발한 지 40~50㎞ 구간 능선 길과 돌담 등은 제주의 오름(작은 화산체) 풍광과 유사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광은 더욱 수려했고 협곡이 깊은 탓에 산세는 험했다. 계곡 사이 곳곳에 파이프를 설치하거나 홈을 파서 수로를 만들었다. 물이 귀한 섬에서 고지대 식수나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란카나리아 특산인 탁구공 크기 조그만 감자를 생산하려고 계단 농사를 짓는 모습도 보였다. 거대한 암벽에는 창고로 쓰거나 원주민이 살았을 법한 인공 동굴이 이색적이었다. 이런 풍광 덕분에 관광객이 몰려든다. 계곡 중간과 아래의 마을은 지름 20㎞ 규모의 거대한 분화구(칼데라) 자리에 형성됐다.

● 정신력으로 버틴 30시간

그란카나리아 섬 해발 1800m 지점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인 ‘로케 누블로’. 구름바위라는 뜻으로 이 섬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다. 라스팔마스=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그란카나리아 섬 해발 1800m 지점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인 ‘로케 누블로’. 구름바위라는 뜻으로 이 섬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다. 라스팔마스=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레이스를 펼친 지 80km를 지나면서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그 때 해발 1800m지점에서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가 보였다. 섬 랜드마크 하나로 ‘구름바위’라는 뜻을 지닌 로케 누블로다. 67m 높이의 바위는 다가갈수록 웅장함이 더했다. 체크포인트(CP)를 통과할 제한시간이 임박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 레이스 CP는 모두 10곳. 도착 시간을 측정해 제한시간을 넘기면 참가선수는 더 이상 레이스를 못한다. CP에서 선수들은 잠깐의 휴식과 함께 식수와 음료, 간식 등으로 재충전한다.

다시 밤이 됐다. 코스를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오기를 10여 차례 하면서 체력소모가 컸다.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일 뿐이다. 제한시간 15~30분 정도만 남겨두고 아슬아슬하게 CP를 통과한 탓에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체력의 한계와 정신적 고통을 견디며 드디어 결승선을 밟았다. 886명 가운데 662등. 성적보다 레이스를 완주한 데 의의를 뒀다. 완주율은 76.6%로 207명이 중도에 기권했다. 이번 대회에는 울트라 트레일러닝 세계 톱 랭커 5명이 모두 참가한 가운데 스페인의 파우 카펠(노스페이스)이 12시간42분8초로 1위를 기록했다.

이 대회는 2003년 시작했다. 첫 대회에 65명이 참가한 뒤 해마다 참가자가 늘면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트레일러닝 대회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125㎞를 비롯해 64㎞, 42㎞ 등 모두 6개 종목에 72개국 3900여 명이 참가했다. 그란카나리아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보여주고 참가자에게 도전의식과 낯선 경험을 주기 위해 2, 3년마다 코스를 조금씩 바꾼다.

그란카나리아섬은

트란스 그란카나리아 125㎞ 대회가 열린 그란카나리아는 스페인 라스팔마스 주에 딸린 1533㎢ 면적의 섬이다. ‘유럽의 하와이’로 불리는 관광휴양지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주도와 매우 흡사하다.

우선 제주도 면적 1849㎢와 비슷하고 섬 최고 고도인 페코데 니에베스(해발 1949m)는 한라산(해발 1950m)높이와 거의 같다. 화산 폭발로 섬이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섬 지하 물로 만든 먹는 샘물이 유명하고 1차 및 관광산업이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도 유사하다.

이 섬은 한국 원양어업의 대서양 전진기지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선원들이 피땀으로 벌어들여 고국으로 보낸 돈은 나라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1970년대 후반 그란카나리아 등 카나리아 제도에 원양어선 250척, 선원 8000여 명이 활동했다. 이들이 20년 동안 벌어들인 외화는 8억7000만 달러에 달했다.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가 15년 동안 벌어들인 돈과 비슷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 선원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라스팔마스 외곽 산나자로 시립공동묘역에 선원 위령탑이 세워졌으며 선원 101기가 안치됐다.

1990년대 원양어선에 대한 유럽연합(EU)과 환경단체의 조업 감시가 심해지면서 한국의 대서양 원양어업이 쇠락했다. 그라카나리아 등 카나리아제도 한인동포도 800여 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협력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2013년 현지에 한스페인해양수산협력연구센터를 설치했다.

한덕훈 센터장은 “원양어업 전진기지로서 의미는 퇴색했지만 유럽에서 드물게 한인사회가 현지에서 조화롭게 뿌리 내린 점 등을 활용하면 아프리카를 향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해양플랜트와 수산양식, 태양광 및 풍력발전 등 관심을 가져야할 교류협력 사업이 많다”고 말했다.

라스팔마스=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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