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호남 길목 지키자” 석주관에 올라 왜적 막아선 구례의병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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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4>
14화: 다시 일어선 의병들 ①

지리산 자락의 구례 석주관(가운데 건물)은 맞은편의 백운산 줄기(사진 위)와 더불어 병목을 이루고 있는 지세다. 가운데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면 바로 남원이 나오기 때문에 호남을 지키는 관문으로서 고려시대때부터 중시돼온 요새이기도 하다. 구례=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지리산 자락의 구례 석주관(가운데 건물)은 맞은편의 백운산 줄기(사진 위)와 더불어 병목을 이루고 있는 지세다. 가운데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면 바로 남원이 나오기 때문에 호남을 지키는 관문으로서 고려시대때부터 중시돼온 요새이기도 하다. 구례=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면 전남 구례가 나온다. 그 접경을 지나면 바로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전략 요충지가 있다. 섬진강을 가운데 끼고 북으로는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가 강변까지 뻗쳐 있고, 남으로는 백운산의 한 봉우리가 치솟아 역시 강변에 접해있다. 양쪽에 큰 산이 대치한 사이 길목이 나 있는 이곳은 누가 봐도 자연이 만든 천혜의 요새 지형이다.

그곳이 바로 석주관이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고려 말 이후 틈만 나면 노략질을 일삼던 왜적을 막던 관문이었던 이곳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도 치열한 혈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1597년 2월 조선 재침을 명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년 발발) 때와 달리 호남과 경상 등 조선 남부지역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특히 임진란 때 화를 면한 조선의 군수병참기지인 전라도 공략에 골몰했다.

왜군의 전라도 침공로는 세 방향이 가능했다. 첫째는 해로를 따라 순천에 상륙해 북으로 공격하거나, 경상도 서부연안에 상륙한 뒤 섬진강을 거슬러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로 향하는 길이다. 둘째, 진주와 함양을 경유해 팔량치를 넘고 운봉 남원을 거쳐 전주로 가는 길이다. 셋째, 경상우도의 거창 안의를 거쳐 육십령을 넘어 진안 전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세 길을 모두 이용했지만 주 공격로는 첫 번째 길이었다. 좌군 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휘하 왜군이 경상도 고성 사천 쪽에 상륙한 뒤 하동으로 진출해 광양 두치진으로 건너온 수군과 합세해 섬진강 하류로부터 구례를 향해 진격했다. 왜군이 석주관에 들이닥친 것은 8월 초였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대파한지 20여일 지난 시점이었다. 석주관 성을 지키던 현감 이원춘이 분투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8월 6일 남원으로 퇴각했다.

왜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 요새를 허문 여세를 몰아 남원성과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당시 가장 영세한 고을 중 하나였던 구례현 일대는 초토화됐다. 왜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양민을 학살하고 코를 베어갔다. 살아남은 이는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갔다.

임진란 때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해 수군을 재건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구례의병을 이끈 사람은 왕득인이었다. 그는 1556년 구례현 남전리에서 개성 왕씨가 참봉 왕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떻게 의병을 모아 조직했는지 자세한 과정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산서전진실기(山西戰陣實記)’에 따르면 구례의병장 왕득인이 그해 9월 22일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숙성치를 넘어와 남원의 조경남 의병진을 방문했다(산서전진실기·정유년 9월 22일)

남원의병과 합동 작전을 논의하고 석주관으로 돌아온 왕득인의 구례의병은 9월 하순부터 10월 초까지 왜군을 상대로 사투를 벌인다. 당시는 왜군이 전라좌도 일원과 구례 지역을 이미 완전히 점령한 상황이었다. 구례의병은 수십 배의 병력과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왜군에 맞서 매복과 기습작전을 반복하며 버텼다. 화살이 떨어지면 바윗돌을 굴러 떨어뜨렸다. 그러나 결국 구례의병은 왕득인을 비롯해 그의 애마까지 모두 전사했다. 석주관 골짜기는 그들이 흘린 구국의 선혈로 물들었다.

그러나 구례의병의 석주관 항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정조 때인 1798년이 되어서였다. 그해 화엄사 법당 중수 때 문서 두 건이 발견됐다. 격문인 ‘기서화엄사상승(奇書華嚴寺尙僧)’과 화엄사 스님의 ‘정유란일기’. 격문은 석주관 혈투를 앞둔 구례의병의 절박한 상황을, 일기는 화엄사 스님들이 의병 전투에 참가해 모두 전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문건 발굴을 계기로 의로운 의병·승병 희생을 현창해야 한다는 공론이 일었다. 지역 유림에서 조정에 이 같은 뜻을 알렸다.

의병, 주로 소규모 단위… 이순신 수군 적극 지원

정유재란기의 의병 운동은 임진왜란 때와 비교해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규모면에서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 단위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의병장들끼리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정유재란기는 의병 운동이 소규모 단위로 흩어져서 벌어졌다. 이는 선조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역모 혐의로 처형 혹은 제거해 의병운동을 위축시킨 영향이 컸다.

또 임진왜란 시기 의병 운동이 거의 대부분 육군 위주로 전개된 반면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의 수군과 연대한 의병들의 수륙 연합 작전이 활발히 벌어졌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이면서 전라좌수사의 자격으로 승려의 의병 활동을 지원했고, 호남 연해안의 지역민들은 자발적으로 수군과 연대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 전술로 당시 왜군들을 당황케 했다.

능욕당하느니… 자결 택한 의병장 집안 딸들

석주관 혈투가 의병들의 패배로 막을 내린 즈음, 왜군의 분탕질로 영남과 호남의 백성들은 재물과 식량을 빼앗기고 부녀자는 능욕까지 당했다. 임진왜란 때 3부자가 순절(殉節)한 의병장인 충렬공 제봉 고경명의 차녀도 이 시기에 왜적에게 희생당했다. 전남 영광의 선비 노상룡에게 시집간 고경명의 차녀는 남편이 왜적에게 당한 뒤 장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임진란 초(1592년)부터 광해군 원년(1609년)까지 18년간의 전란 체험과 전쟁 양상 등을 기록한 일기인 고대일록(孤臺日錄)은 ‘흉적이 구례와 남원에 들어와서 사방으로 나다니며 불을 지르고 겁탈했다. 이들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온 것과 같으니 통탄할 일이다’(정유년 8월 11일)라고 적고 있다.

고대일록의 저자인 정경운 역시 의병장이었다. 함양의 선비인 정경운은 의병장 정인홍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임진란 때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김면 휘하에서 군량보급과 군기조달에 주력해 경상도 지역 왜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경운의 장녀도 이 시기에 함양으로 쳐들어온 왜병을 피해 피신했다 발각돼 능욕 직전 단도로 자진했다.

구례의 2차 의병 운동… 계곡이 ‘피내(血川)’로 바뀌어

구례의병들이 산화한 지 한 달여 지난 1597년 11월 초. 구례 읍내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2차 의병이 일어났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은 ‘석주관 복수의병’을 자임했다.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 5인의 의사(義士)들도 수백 명을 의병 대열에 모았다. 각자의 가노(家奴)들을 동원한 다음 지리산에 피란 중인 지역민들을 모았다. 1차 때보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구성된 2차 구례의병이 출범했다.

2차 구례의병은 11월 8일 연곡에서 조경남이 이끄는 남원의병과 합동 작전으로 왜군 60여 명을 무찔렀다. 연곡에서 의병에게 일격을 당한 왜군은 보복 공격에 나섰고 11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2차 석주관 혈투가 벌어진다.(화엄사 ‘정유란일기’)

2차 석주관 전투를 앞두고 구례의병은 사기가 드높았다. 화엄사에서 의승병(義僧兵) 153명과 군량미 103섬을 지원받은 것이다. 군세를 보강한 구례의병은 석주관의 지세를 이용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2차 의병 주력인 ‘5의사의병’을 좌우군으로 통합 편성해 석주관 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배치해 왜적의 빈틈을 치는 기습 협공을 노렸다. 왕의성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산 정상에 진을 쳤다.

왜병을 계곡으로 유인한 뒤 석주관 성과 그 맞은편 숲 속에 잠복한 5의사군이 먼저 작전을 전개했다. 화엄사 의승병들과 합세해 좌우에서 적을 기습했다. 산 위에 진을 친 왕의성 의병대는 계곡 아래 적에게 거석을 굴려 내리는 석탄(石彈)공격을 퍼부었다. 2차 구례의병은 전투 초기에는 대승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끝없이 밀려오는 적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의병들은 피 흘리며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계곡 좌우에 있던 5의사군과 의승군 전열이 적의 공세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계곡 주변은 의병과 왜병의 시신으로 뒤덮였다. 2차 의병 가운데 5의사군과 화엄사 의승병 중 생존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420년 전 석주관 성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을 지금도 ‘피내(血川)’로 부른다. 그나마 산 위에 진을 친 왕의성의 의병부대는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2차 석주관 혈투가 벌어진 시기는 동짓달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였다. 당시 전라좌도 거의 전역을 왜군이 점령해 외부 구원군이 끊겨버린 절망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처절하게 싸우다 거의 모두 순절했다.

호남 방어 대책 중요성 그토록 강조했건만…

구례 석주관의 지리적 특성과 방어 전략상 중요성을 조선 조정도 알고 있었다. 정유재란발발 한 해 전인 1596년 비변사는 선조에게 계문을 올렸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역 요해처로 남원이 가장 중요한데, 순천과 남원 사이에 석주진이 있으니 바로 진주로 통하는 곳입니다. 구례는 가장 먼저 적을 맞게 되는 곳이며 또 성첩도 견고하니 만약 인재를 얻어 이곳을 잘 지킨다면 적군이 서쪽(전라도)을 침범하는 기세를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선조실록 권45, 재위 29년 정월 22일)

선조는 ‘그대로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조, 전라병사, 비변사 등 어느 기관도 특별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라도는 임진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도 전쟁 수행을 위해 필수적인 군수보급 기지였다. 전쟁 전 조선 재정 수입의 거의 절반을 전라도가, 7개 도가 나머지 절반을 부담할 정도였다. 이순신이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조선 조정은 정유재란 전부터 전주 남원 순천 나주 등 전라도 주요 네 고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다짐했었다. 하지만 조정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사전에 취한 조치라고는 문무를 겸비한 전(前) 남도병사 임현을 배치한 게 다였다. 위나 아래나 명나라 군사에게 의존하고, 병력이나 무기에서 (왜적에 비해) 열세인 지역의병의 활약을 기대할 뿐이었다.

두차례에 걸쳐 석주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7의사 묘’. 모두 구례 출신의 순국선열들이다. 구례=박영철 기자
두차례에 걸쳐 석주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7의사 묘’. 모두 구례 출신의 순국선열들이다. 구례=박영철 기자
당시 전주·남원 일원에는 명 주력군대가 이미 와있었다. 명나라 장수 양원이 그해 6월부터 3000여 군사를 지휘해 남원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군은 석주관에서 벌어진 의병들의 사투를 방관했다. 지형이 험준해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7주갑(周甲·420년·1주갑은 60년) 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승병 153명의 요람이던 화엄사에는 8도 의승병 총대장이던 서산대사에게 선조가 하사한 가사(袈裟)를 비롯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구례의병들을 이끌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7의사’의 희생을 추념하는 부도와 비석은 세월의 더께로 빛이 바랬다. 이들의 헌신과 충의(忠義)를 지금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받들고 기리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구례=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안영배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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